‘64.7% 대 10.5%.’ 지난달 17일 기준 현대·기아자동차와 미국 제너럴모터스(GM)의 공장 가동률이다. 르노(15.0%) 포드(17.2%) BMW(18.2%) 등 다른 글로벌 자동차업체들이 10%대 가동률을 벗어나지 못한 것과는 대조적이다.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으로 세계 자동차 공장들이 멈췄지만 현대·기아차는 ‘생산절벽’을 피하고 있다. 선제적인 방역과 공급망 관리로 셧다운을 막은 것이다. 자동차뿐만이 아니다. 지난 3월 국내 제조업 평균 가동률은 코로나19 이전과 비슷한 수준인 74.1%(통계청 발표)를 기록했다.

한국 경제의 버팀목이 돼 오던 제조업이 대반격을 준비하고 있다. 글로벌 팬데믹(전염병 대유행) 상황에서도 대규모 투자를 착착 진행하며 기회를 엿보고 있다. LG디스플레이는 3분기에 중국 광저우 유기발광다이오드(OLED) 패널 공장을 본격적으로 가동할 계획이다. OLED TV 수요 폭발에 대비한 움직임이다. 삼성전자도 연말부터 D램 크기를 줄일 수 있는 극자외선(EUV) 노광장비를 세계 최초로 D램 공정에 적용하는 등 경쟁력을 끌어올리는 데 집중하고 있다. 호세 무뇨스 현대차 글로벌 최고운영책임자(COO)는 “코로나19가 종식되면 안정적으로 물량을 공급할 수 있는 현대차가 시장 점유율을 높이며 승자가 될 것”이라고 말했다.

우리 기업들은 과거에도 위기를 자양분 삼아 몸집을 불렸다. 삼성전자는 1997년 외환위기를 기점으로 글로벌 기업으로 발돋움했다. 3조원대에 불과하던 시가총액이 3년 만에 6배 이상 늘었다. 캐서린 만 씨티그룹 선임이코노미스트는 제조업 기반이 탄탄한 한국이 급격한 ‘V자 회복’을 할 수 있을 것으로 전망했다.

우태희 대한상공회의소 부회장은 “좋은 위기를 낭비하지 말라(Never waste a good crisis)”는 윈스턴 처칠 전 영국 총리의 명언을 다시 꺼냈다. 그는 “코로나19 위기 이후 수요가 급증할 품목이 많이 보인다”며 “우리 기업들이 이번 위기를 기회로 활용했으면 좋겠다”고 했다.
"11월 블프서 승부 갈린다"…韓 제조군단, 글로벌 '보복 소비' 잡아라
"TV·가전제품·車 교체 수요 한꺼번에 몰릴 것"


“오는 11월 블랙프라이데이가 기점이 될 겁니다. 세계적으로 ‘보복적 소비’가 일어날 가능성이 있습니다.”

국내 대기업의 한 마케팅담당 임원이 조심스럽게 꺼낸 얘기다. 미국과 유럽 등을 강타한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이 올해 여름을 기점으로 수그러든다는 것을 전제로 마케팅 계획을 짜고 있다는 설명이었다. 또 다른 대기업의 전략담당 임원도 “일부 조직을 떼어내 ‘포스트 코로나’ 계획을 마련하고 있다”며 “경쟁업체들보다 발빠르게 물량 공세에 나서는 게 핵심”이라고 귀띔했다.
위기에 강한 K제조업…퀀텀점프 기회다
‘포스트 코로나’ 준비하는 기업들

최근 삼성전자와 현대자동차, LG전자 등 국내 간판 기업들의 관심은 온통 미국과 유럽에 쏠려 있다. 현지 생산법인에 문제가 있는지를 살피는 일도 중요하지만 코로나19로 꽁꽁 얼어붙은 소비가 언제 재개되느냐도 주요 관심사다. 전략 제품의 출시 시기, 마케팅 규모와 방식 등을 결정하기 위해서다. LG전자 관계자는 “지금은 마케팅을 해도 비용 대비 효과가 떨어진다”며 “코로나 여파가 한풀 가실 것으로 보이는 하반기 이후에 ‘실탄’을 집중할 계획”이라고 말했다.

시장조사기관들도 코로나19 사태 이후 시장 상황을 낙관적으로 보고 있다. 올해는 시장 규모 축소가 불가피하지만 내년부터는 ‘V자’ 반등 가능성이 높다는 관측이 많다. 옴디아는 지난달 24일 내놓은 보고서에서 내년 디스플레이 수요가 올해보다 9.1% 늘어날 것으로 예측했다. 코로나19로 올해 못 판 디스플레이 제품이 내년에 한꺼번에 팔릴 것으로 봤다. PC와 스마트폰 등에 들어가는 D램 반도체 시장도 급성장할 전망이다. 가트너는 내년 D램 시장을 올해보다 38.2% 늘어난 839억달러 규모로 내다봤다. 업계 관계자는 “TV와 가전제품, 자동차 등은 ‘때가 되면 바꾸는 제품’이란 공통점이 있다”며 “코로나19가 어느 정도 진정되면 교체 수요가 한꺼번에 몰릴 것”이라고 설명했다.

‘R&D 시계’도 4분기 이후에 맞춰져

지난달 말부터 이어지고 있는 주요 기업 1분기 실적 콘퍼런스콜의 내용은 대체로 비슷하다. “코로나19에 따른 소비심리 악화로 2분기 이후 시장 상황을 예측하기 힘들다”면서도 “미래를 위한 투자는 계획대로 진행한다”는 말을 빼놓지 않고 있다.

대기업들의 ‘연구개발(R&D) 시계’는 올 4분기와 내년에 맞춰져 있다. 차별화된 제품군을 준비해 포스트 코로나 시장을 노리겠다는 얘기다. 삼성전자는 D램의 크기를 줄이고 전력 효율성을 높이는 ‘미세화’에 공을 들이고 있다. 극자외선(EUV) 노광장비를 세계 최초로 D램 공정에 적용한다. 올해 말 테스트를 거쳐 내년부터 10나노급 3세대 D램을 본격 양산할 계획이다. 삼성전자는 중장기적으로 EUV에만 10조원 이상 투자할 방침이다.

SK하이닉스의 전략도 비슷하다. 올 들어 시설투자를 줄였지만 이천 신공장(M16) 클린룸 공사는 예정대로 연말까지 진행한다. 이 공장은 내년부터 본격적인 양산을 시작한다.

디스플레이 업계의 움직임은 반도체 업계보다 한 박자 빠르다. LG디스플레이는 2분기 중 중국 OLED 공장 테스트에 나선다. 본격 양산 시점은 3분기부터다. OLED TV 수요 폭발에 대응하기 위해 광저우 공장 가동을 서두르고 있다는 게 회사 측 설명이다.

기업들은 TV와 건강가전, 자동차 등이 포스트 코로나 시장을 개척할 선봉장 역할을 할 것으로 보고 있다. TV는 70인치가 넘는 대형 제품이 주력이다. 코로나19로 집에서 오랜 시간을 보내면서 ‘대화면 TV’에 대한 욕구가 커졌다는 분석이다. 삼성전자는 ‘QLED 8K’ 초대형 제품을 다양화하고 차세대 제품인 대형 ‘마이크로 LED’ 모델도 늘릴 계획이다. 75·88·93·110·150·292인치 등으로 제품군을 세분화하는 방안이 거론된다.

공기청정기, 의류관리기 등 건강가전도 인기를 끌 것으로 기대된다. 코로나19로 인해 바이러스, 세균 등에 대한 경각심이 높아진 영향이다. 자동차 교체 수요가 한꺼번에 몰릴 가능성도 점쳐진다. 현대·기아차는 투싼과 스포티지, G70, 싼타페, 카니발 등의 새 모델을 연내 내놓고 ‘수요 폭발’에 대비할 계획이다.

송형석/황정수/도병욱 기자 click@ha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