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96회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영화 '마리우폴에서의 20일'로 장편 다큐멘터리상을 수상한 엠스티슬라브 체르노프 감독(가운데)이 수상소감을 밝히고 있다.
제96회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영화 '마리우폴에서의 20일'로 장편 다큐멘터리상을 수상한 엠스티슬라브 체르노프 감독(가운데)이 수상소감을 밝히고 있다.
“이 영화를 만들 일이 없었다면 좋았을 겁니다.”

10일(현지 시각) 미국 로스앤젤레스(LA) 돌비극장에서 열린 ‘제96회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엠스티슬라브 체르노프 감독이 만감이 교차하는 표정을 한 채 던진 말이다. ‘마리우폴에서의 20일’로 장편 다큐멘터리상에 선정되며 생애 첫 오스카를 거머쥔 그는 영광의 자리에서 왜 이런 수상소감을 밝혔을까.

"영화는 기억을, 기억은 역사를"

우크라이나 영화 역사상 첫 아카데미 수상작인 ‘마리우폴에서의 20일’이 러시아의 공격으로 포위된 항구도시 마리우폴에 남아 있던 종군기자 취재팀이 기록한 현장의 참사를 담은 영화이기 때문이다.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공격하지 않는 역사와 맞바꿀 수 있다면 이 상을 교환하고 싶다"는 그의 이어진 소감에 관객석에 앉아 있던 할리우드 스타들은 고개를 끄덕이며 박수갈채를 보낸 이유다.

체르노프 감독은 이날 영화가 가진 힘을 강조하기도 했다. 그는 영화인들을 향해 "역사와 과거를 바꿀 순 없지만 우리 모두가 할 수 있는 일이 있다"며 "역사를 바르게 기록하는 일과 진실이 승리하는 것"이라고 했다. 그러면서 "영화는 기억을 만들고 기억은 역사를 형성한다"고 덧붙였다. 수상의 기쁨뿐 아니라 여러 감정이 표출되는 아카데미 시상식 무대가 소신을 밝히는 장(場)으로도 활용된 순간이다.
제96회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남우주연상을 수상한 킬리언 머피
제96회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남우주연상을 수상한 킬리언 머피

“놀런은 천재적”…“이 역할, 내가 원했어”

이날 시상식에선 체르노프 감독뿐 아니라 수상자들의 다양한 소감이 이어졌다. 작품상을 비롯해 7개 부문을 싹쓸이한 ‘오펜하이머’ 수상소감은 흥분 그 자체였다. 남우주연상을 받은 킬리언 머피는 시종일관 진지한 분위기로 일관했던 영화에서와 달리 활짝 웃으며 "지난 20년 통틀어 가장 만족스러운 작품이었다"고 밝혔다.

특히 영화를 연출한 크리스토퍼 놀런 감독에 대한 감사가 이어졌다. ‘오펜하이머’ 음악감독으로 음악상을 받은 루트비히 고란손은 현악기를 중심으로 음악을 만든 것을 두고 "바이올린을 사용하는 건 놀런 당신의 아이디어였다"며 "바이올리니스트인 아내와 작업할 수 있어 행복했다"고 말했다. 영화 제작자인 엠마 토마스는 작품상 수상소감으로 "너무 오래 이 순간을 바라 왔고, 실현되지 않을 것 같았지만 이 자리에 서게 됐다"며 "유일하고 천재적인 놀란 감독에게 감사한다"고 했다.
제96회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감독상을 받은 크리스토퍼 놀란
제96회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감독상을 받은 크리스토퍼 놀란
오펜하이머와 대립하는 루이스 스트로스 역할로 남우조연상에 호명되며 데뷔 첫 오스카상을 수상한 로버트 다우니 주니어는 "비밀을 하나 털어놓자면 내가 이 역할을 원했다"면서 "제작진과 출연진, 놀런 감독이 이를 알아봤다"고 했다.

"드레스가 뜯어져"…"Happy mother's day!"

릴리 글래드스턴, 샌드라 휠러 등 쟁쟁한 경쟁자를 제치고 여우주연상을 받은 ‘가여운 것들’의 엠마 스톤이 쉰 목소리로 건넨 첫 마디는 "드레스가 뜯어져 버렸다"였다. 앞서 핫핑크 수트를 빼입은 라이언 고슬링이 자신이 켄으로 연기한 영화 ‘바비’의 주제곡 ‘아임 저스트 켄’을 열창할 때 자신도 지나치게 흥분을 했다는 것. 자신에게 첫 아카데미 여우주연상을 안긴 ‘라라랜드’에서 함께 연기한 인연을 넌지시 드러낸 스톤은 두 번째 여우주연상을 만들어준 ‘가여운 것들’을 연출한 요르고스 란티모스 감독에게 "벨라 벡스터로 살게 해 줘 감사하다"고 전했다.
제96회 아카데미상에서 여우주연상을 받은 엠마 스톤
제96회 아카데미상에서 여우주연상을 받은 엠마 스톤
단편 애니메이션상을 받은 ‘워 이즈 오버! (War is over!)’의 수상소감도 웃음을 자아냈다. 비틀스 멤버 존 레넌과 그의 부인인 오노 요코의 음악과 반전 메시지에 영감을 받아 제작된 이 영화가 수상작으로 호명되자 총괄 제작자이자 존 레넌의 아들인 션 레넌이 "Happy mother's day! (어머니의 날 축하해요!) 오노 요코"라고 외쳤다. 비록 시상식이 미국에서 열렸지만, 이날이 영국에선 어머니의 날이란 점을 강조한 것이다.

유승목 기자 mok@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