염재호 태재대 총장이 서울 원서동에 자리한 태재대에서 한국경제신문과 인터뷰하고 있다. 염 총장은 “개교 전 백지 상태부터 시작해 교육 시스템을 생각대로 자유롭게 꾸려갈 수 있어 기쁘다”며 “태재대가 대학가의 ‘메기’ 역할을 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강은구 기자
염재호 태재대 총장이 서울 원서동에 자리한 태재대에서 한국경제신문과 인터뷰하고 있다. 염 총장은 “개교 전 백지 상태부터 시작해 교육 시스템을 생각대로 자유롭게 꾸려갈 수 있어 기쁘다”며 “태재대가 대학가의 ‘메기’ 역할을 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강은구 기자
“의사의 전문성은 병과 증상에 대해 암기한 정보와 많은 진료 경험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만약 그들이 외운 모든 지식과 진료 정보를 누구나 인터넷에서 확인할 수 있게 된다면 어떻게 될까요?”

염재호 태재대 총장은 최근 한국경제신문과의 인터뷰에서 “인공지능(AI)이 영상판독도 하는 세상”이라며 “앞으로 AI를 활용해 질병 정보를 얻은 환자들이 의사가 제대로 판단하는지를 지켜보는 세상이 도래할 것”이라고 진단했다. 현 상황을 ‘대학의 위기’라고 진단한 염 총장은 “수도권 대학 정원은 축소하고 등록금을 풀어주는 등의 대안을 마련해야 수도권과 지방 대학이 모두 살 수 있다”고 조언했다.

태재대는 한국판 미네르바대로 불린다. 태재대 학생들은 한국 외에 미국, 중국, 일본, 러시아에서 한 학기씩 지내며 토론 중심의 강의를 듣는다. 수업은 모든 교수가 20명 이하의 학생들과 함께 온라인 영어 토론방식으로 진행한다. 고려대 총장을 지낸 염 총장이 초대 총장을 맡아 지난 9월 성공적으로 개교했다.

▷챗GPT로 대변되는 AI 시대가 빠르게 다가오고 있습니다. 한국 교육의 문제점은 무엇이라고 생각합니까.

“20세기 교육은 대량 생산 체제에 맞는 시스템이었습니다. 일을 잘게 쪼개고 표준화, 전문화했죠. 이것들을 나중에 합쳐서 대량 생산하는 방식이었습니다. 학부만 나와도 한 분야의 전문성만 있으면 평생을 먹고살 수 있었던 이유입니다. 하지만 지금은 다릅니다. 그동안 전문적이라고 생각한 일들이 컴퓨터에 의해 자동화가 됐습니다. 사람들은 더 창의적인 일을 해야 합니다. 하지만 교육이 과거에 머물러 있는 것, 그것이 가장 큰 문제입니다.”

▷새로운 시대에는 어떤 교육이 필요합니까.

“대학에서는 앞으로 문제를 해결해나갈 수 있는 기초 체력을 길러줘야 합니다. 학생들은 고등학교까지 암기를 중심으로 기초 지식을 다 배웠습니다. 이를 활용하고 암묵지로 내재화할 수 있도록 훈련시켜야 합니다. 가장 중요한 것이 토론입니다. 이를 통해 창조적인 상상력을 키워야 합니다. 30년 전처럼 박사 학위를 받은 교수가 가르쳐주는 내용을 모두 외우고, 이를 적어내는 시험으로는 경쟁력을 갖출 수 없습니다.”

▷태재대는 어떻게 교육 하나요.

“태재대는 1학년 때 역사, 철학, 수학, 물리 등을 가르치지 않습니다. 대신 개인적인 역량(비판적 사고, 창의적 사고, 자기주도성), 사회적 역량(소통과 협력, 다양성과 공감, 글로벌 화합과 지속 가능성)을 키우기 위한 10개 교과목을 배우도록 합니다. 교수법도 기존 대학과 다릅니다. 모든 수업은 강의가 아니라 토론으로 이뤄집니다. 그리고 학생들의 수업을 분석해 교수가 발언하는 시간, 학생들이 토론에 참여한 시간, 공통 발표 내용 등을 바탕으로 매주 피드백을 줍니다. 이를 통해 토론 과정에서 학생의 창의력과 분석력 등이 향상될 수 있도록 도움을 줍니다.”

▷한국 대학은 학생 선발에 자율권이 부족합니다.

“등록금 인상과 대학 입시에 자율성이 보장돼야 합니다. 대학도 노력해야 합니다. 예를 들어 학령인구 감소와 지역대학 소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수도권 대학들이 2030년까지 학부 정원 30%를 줄이겠다고 선언하고 대신 등록금 인상 등 자율성을 확보하는 대안을 제시할 필요가 있습니다. 지금 학부 정원은 1980년대 졸업정원제를 도입하면서 모든 대학이 정원을 두 배 이상으로 늘린 상태가 유지되고 있습니다. 학령인구가 계속 줄고 있는데, 늘어난 정원을 유지할 이유가 없습니다. 정원 축소를 대학 자율에 맡겨선 어렵습니다. 1980년대 정부가 정책적으로 정원을 확대한 것처럼 이제는 정부가 정책적으로 축소해야 합니다.”

▷수도권 대학 정원을 줄여야 하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수도권 대학 정원이 유지된 가운데 학령인구가 줄어들면서 지방 대학이 위기를 맞고 있습니다. 지방 대학이 사라지는 것은 그 지역만의 문제가 아닙니다. 대학 수가 줄어 교수가 될 가능성이 점점 없어지게 되면서 수도권 대학들의 대학원도 무너지고 있습니다. 결국 한국 교육의 생태계가 붕괴되는 것입니다.”

▷한국 교육의 또 하나의 문제점으로 의대 쏠림 현상이 꼽힙니다.

“우리나라는 보건복지부와 의사협회가 의대 정원을 통제하고 있으니 경쟁률이 높을 수밖에 없습니다. 연봉도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국가 중 가장 많이 받고 정년도 없습니다. 하지만 이 같은 쏠림 현상이 지속되진 않을 것으로 봅니다. 의사가 알고 있는 지식과 진료 정보를 모두 인터넷에서 확인할 수 있는 시대가 오고 있습니다. 의사의 권위가 아니라 AI의 도움으로 진료에 관한 정보를 얻은 환자들이 의사가 제대로 하는지 지켜보는 세상이 올지 모릅니다. 그렇게 되면 의사의 경쟁력이 떨어질 수밖에 없겠죠.”

▷입학 시험에서 자율성이 필요한 이유는 무엇인가요.

“일반 대학은 정원에 맞춰 수능 성적순으로 학생들을 선발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입학 포기, 중도 이탈이 많습니다. 더 높은 성적으로 갈 수 있는 학교, 학과가 있다면 언제든지 옮기니 말입니다. 대학들이 수능이 아니라 자체적으로 학생을 선발할 수 있도록 해야 합니다. 동시에 학교들도 노력해야 합니다. 지금은 통합 학과나 학부 같은 새로운 방식으로 학생을 뽑으려고 하면 교수가 반대합니다. 미국의 올린공과대학 같은 경우 5년만 지나면 과목을 없앤다고 합니다. 빠르게 변화하는 세상에 맞는 인재를 키우기 위해서죠.”

▷태재대는 학생을 뽑을 때 무엇을 중요하게 생각합니까.

“잠재력입니다. 선발 과정에서 ‘원석’을 발굴하려고 노력했습니다. 이번 학기에는 정원보다 적은 인원을 선발했는데 정원을 채우는 것이 중요한 게 아니라 학교의 인재상에 맞는 가능성 있는 학생을 선발하는 것이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학생부 등으로 4~5배수를 뽑은 뒤에는 면접으로 선발합니다. 20분간 영어지문을 보고 40분간 교수와 지원자 5명이 수업을 하며 평가하고, 인적성을 알아보기 위한 면접을 따로 봤습니다. 그 결과 다양한 장점을 지닌 학생들을 뽑을 수 있었습니다.”

▷한국을 포함해 5개 나라에서 수업을 듣게 됩니다.

“국제정세를 아는 리더로 키우기 위한 것입니다. 미·중 갈등이 점점 심화하고 있는데 한국은 미국, 중국 모두를 이해해야 합니다. 사회 시스템과 문화가 다른 두 나라 간 갈등이 왜 일어나는지, 어느 게 맞고 틀린 게 아니라 다르다는 것을 이해할 수 있어야 합니다. 다양성과 공감 능력을 갖춘 인재로 키워야 한다는 것입니다. 특히 한국 주변의 4강에 대한 이해가 필수적이라고 판단해 미국, 일본, 중국, 러시아에 한 학기씩 체류하며 현장학습과 수업을 듣도록 했습니다.”

염재호 총장은 출석부·상대평가 폐지…대학가 혁신의 아이콘

염재호 태재대 총장은 대학가에서 ‘혁신의 아이콘’으로 불린다. 2015~2019년 제19대 고려대 총장으로 일하며 성적장학금과 입시 논술전형 등을 폐지했다. 소위 ‘3무(無) 정책’을 도입해 출석부와 상대평가, 시험감독을 없애기도 했다. 자유로운 사고가 학생들의 창의성과 문제 해결 능력을 키운다는 신념에서였다.

2019년 고려대에서 정년퇴임한 뒤에는 태재대 설립준비위원회 위원장을 맡았다. 이번 학기 첫 입학생을 받은 태재대에서 한국판 혁신 대학을 만들기 위한 다양한 학습 커리큘럼과 프로그램을 고민하고 있다.

1955년 서울 출생인 염 총장은 신일고, 고려대 행정학과를 졸업한 뒤 미국 스탠퍼드대에서 정치학 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1990년 고려대 행정학과 교수로 부임해 외교통상부 정책자문위원장, 서울시 산학협력포럼 회장, 한일미래포럼 대표, 기획재정부 공공기관 경영평가단장, 한국고등교육재단 이사장과 한국정책학회 회장, 현대일본학회 회장을 지냈다. 2002년 제16대 대통령 선거 당시 대통령 후보 합동 토론의 진행자를 맡아 유명해졌다. 현재 태재대 총장을 비롯해 SK 이사회 의장, 서울평화상 문화재단 이사장 등을 맡고 있다.

강영연/이혜인 기자 yykang@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