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광모 LG 대표가 2019년 08월 LG화학 기술연구원에서 차세대 OLED 시장 선도를 위한 핵심 공정 기술 '솔루블 OLED' 개발 현황에 대해 연구개발 책임자들과 논의하는 장면 [사진=LG화학]
구광모 LG 대표가 2019년 08월 LG화학 기술연구원에서 차세대 OLED 시장 선도를 위한 핵심 공정 기술 '솔루블 OLED' 개발 현황에 대해 연구개발 책임자들과 논의하는 장면 [사진=LG화학]
구광모 LG그룹 회장의 조직 개혁이 벤처 투자와 외부 인재 수혈로 속도를 더해가고 있다. 임직원들에게 '벤처 마인드' 장착을 요구한 것은 물론 확실한 성과와 보상으로 도전의식을 끌어올려 기업 분위기를 쇄신하겠단 의지로 해석된다.

구광모 회장, LG노바 통해 美벤처 협력 강화

26일 업계에 따르면 LG전자는 최근 스타트업과의 협력 강화, 신사업 발굴을 위해 미국 실리콘밸리에 혁신 조직 'LG노바(LG NOVA)'를 출범시켰다. 지난해 말 사업재편과 인수합병 등을 담당해온 최고전략책임자(CSO) 부문 산하에 신설한 북미이노베이션센터를 LG노바라는 정식 조직으로 격상시킨 것이다.

LG노바는 실리콘밸리에서 투자와 파트너십을 통해 스타트업, 기술 벤처와 협력하고 이를 바탕으로 LG전자의 신사업 모델을 발굴하는 역할을 맡는다. 특히 일상생활에서 모빌리티·연결성·유용성을 개선할 수 있는 솔루션에 집중한다는 복안이다.

LG전자는 LG노바 대표에 지난해 영입한 사물인터넷(IoT) 분야 사업개발 전문가 이석우 전무를 앉혔다. 미국 국립표준기술원(NIST) 부국장, 미국 백악관 IoT 부문 대통령 혁신연구위원을 역임한 인물이다. 이 대표는 "혁신은 다양한 방식으로 생기지만 최고의 혁신은 '협력'을 통해 이뤄진다. 이것이 LG노바가 존재하는 기본 원칙"이라고 강조했다.

아울러 기업형 밴처캐피털(CVC) 'LG테크놀로지벤처스'도 설립해 미국 유망 벤처 투자 발굴에도 박차를 가했다. LG전자 LG디스플레이 LG화학 LG유플러스 LG CNS 5개 계열사가 총 4억2500만달러를 출자한 펀드를 운용하며 모빌리티 공유 소프트웨어 '라이드셀', 양자컴퓨팅 회사 '시큐시' 등 26곳이 넘는 회사에 투자를 단행했다.

LG테크놀로지벤처스는 구 회장이 취임 후 첫 출장지로 선택한 곳으로 알려진 만큼 인공지능(AI), 양자컴퓨팅, 로봇을 비롯해 미국의 다양한 신기술 스타트업과의 접점을 늘려가고 있다.

LG그룹 내부 생태계 구축에도 박차

다음달 1일까지 두 번째 'LGE 어드벤처' 모집이 진행 중이다. [사진=LG전자]
다음달 1일까지 두 번째 'LGE 어드벤처' 모집이 진행 중이다. [사진=LG전자]
구 회장이 벤처에 공을 들이는 이유는 매출의 큰 비중을 차지하는 가전, TV 사업 외에 신규 사업을 발굴하기 위해서다. LG전자는 구 회장의 미래 신성장동력 육성 전략에 따라 스타트업 투자를 통한 신사업 발굴을 추진해왔다.

LG전자는 지난 4월 미래에셋그룹과 국내 유망 스타트업에 투자할 1000억원 규모의 펀드를 조성했다. 당시 양측은 각 500억원을 출자해 전기차 생태계, 디지털 헬스케어, 데이터 관련 사업 등 다양한 신사업 분야 스타트업에 전략적 투자를 하기로 했다. 앞선 1월에는 디지털 서비스, 콘텐츠 분야의 TV 사업 확대를 위해 광고 및 콘텐츠 데이터 분석 스타트업 '알폰소'를 인수하기도 했다.

그러면서 그룹 내부 벤처 생태계 구축에도 힘을 쏟고 있다. LG전자는 직원들 아이디어를 활용해 새로운 사업 기회를 모색하는 사내벤처 프로그램 'LGE 어드벤처'를 시행 중이다. 지난 7월30일부터 오는 9월1일까지 임직원 대상으로 신사업 아이디어를 공모한 뒤 서류 심사와 심층 인터뷰 등을 거쳐 11월 사내벤처팀을 최종 선발할 예정이다.

더 많은 임직원에게 기회를 제공하고 도전하는 조직문화를 뿌리 내리기 위해 선발 규모를 지난해보다 늘릴 계획이다. 올해에는 모집 대상 지역을 북미와 유럽 해외 법인까지 확대했다.

LG의 외부 인재 수혈은 '인사 혁신'

구광모 LG그룹 회장 [사진=LG그룹]
구광모 LG그룹 회장 [사진=LG그룹]
구 회장 이후 두드러진 또 하나의 특징은 외부 인재 수혈이다. '인화(人和)의 LG'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그간 순혈주의가 강하다는 평가를 받아온 LG로서는 상당히 파격적인 정책으로 읽힌다. 인사 혁신이라는 말까지 나온다.

LG전자는 지난달 이종 산업인 나이키, 경쟁사로 꼽히는 SK매직 출신 임원을 각각 영입했다. 나이키코리아 출신 정순호 상무는 LG전자 생활가전(H&A) 온라인영업 담당 신규 임원으로 자리를 옮겼다. 정 상무는 나이키코리아에서 15년간 디지털커머스 업무를 수행한 디지털 비즈니스 전문가다.

비슷한 시기 SK매직 출신의 이성진 상무는 신사업 태스크 리더로 영입됐다. 이 상무는 SK네트웍스에서 SK매직을 인수할 때 전략기획팀장을 맡은 인물로, SK매직의 해외시장 진출을 기반을 닦은 데 기여한 것으로 전해졌다.

구 회장은 앞서 취임 후 첫 경영진 인사에서 LG화학 창립 이래 첫 외부 출신 최고경영자(CEO)로 신학철 3M 부회장을 영입한 적 있다. 석유화학사업본부 글로벌사업추진담당으로 BP코리아 대표 출신의 하성우 대표, 엔지니어링소재사업부장 전무로 김 스티븐 헨켈코리아 대표를 선임하는 등 지난 3년간 50여명의 임원급 외부 인재를 그룹에 수혈했다.

"비효율적 보고 문화부터 바꿔야"


올 초 모바일 사업에 완전히 손을 떼고 자동차 배터리에 역량을 집중하는 LG그룹은 과도기에 놓였다는 평가를 받는다. 그만큼 구 회장의 개혁은 절박함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인다.

최근 제너럴모터스(GM) 전기차 리콜 결정으로 차량 배터리를 공급한 LG화학과 LG전자 등 LG 계열 상장사 주가가 폭락한 지난 23일 LG에너지솔루션 직원으로 추정되는 이가 익명 직장인 커뮤니티 '블라인드'에 올린 글이 화제가 됐다.

이 직원은 "엘무원이라는 생각, 조직 문화부터 싹 바꿔야 한다"고 했다. '엘무원'은 'LG'와 '공무원'을 합친 말로, 박봉에 복지부동(땅에 엎드려 움직이지 아니함을 뜻하는 사자성어)하면서 근속기간이 긴 편인 LG 문화를 비꼬는 말이다. LG의 보고 문화를 강하게 비판한 그는 "정작 중요한 '근본 해결책'은 없는 보고만 계속하는 의사결정 과정이 반복된다"고 주장했다.
서울 여의도 LG사옥 [사진=연합뉴스]
서울 여의도 LG사옥 [사진=연합뉴스]
업계 관계자는 "LG는 독자적으로 기술을 개발할 수 있는 역량을 갖췄지만 반대급부로 실수를 인정하지 않는 경향도 있다"며 "LG 특유의 상명하복 시스템으로는 개혁이 안 된다. 타 기업과 협력하는 문화나 수평적 제도, 생동감 넘치는 벤처기업 분위기가 정착돼야 한다"고 덧붙였다.

이와 관련해 한 LG 계열사 임원은 "구 회장 취임 이후 내부 분위기가 싹 바뀌었다. 전에는 성과를 못내도 '우리 식구 챙기기'가 있었다면 지금은 다르다"면서 "벤처 투자가 제대로 자리잡고 외부 영입 인재들이 성과를 내면 옷 벗어야 할 임직원들이 많아질 것"이라고 귀띔했다.

강경주 한경닷컴 기자 qurasoha@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