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연합(EU)이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으로 타격을 입은 회원국들의 경제회복을 지원하기 위해 7500억 유로(약 1020조원) 규모의 기금 조성계획을 내놨다. EU 출범 이래 최대 규모의 경기부양책이다.

스페인과 이탈리아 등 코로나19 피해가 컸던 회원국들을 대상으로 보조금과 대출을 우선 지원하는 방식이다. 단, 지원 전제조건으로 재생에너지 등 저탄소 산업에 기금을 지원해야 한다는 단서를 달았다.

EU 행정부인 집행위원회는 27일(현지시간) 이 같은 내용을 담은 코로나19 기금조성계획을 발표했다. 우르줄라 폰데어라이엔 집행위원장(사진)은 “EU의 코로나19 기금은 그린딜과 디지털화 등 미래 투자를 통해 우리가 직면한 엄청난 도전들을 기회로 바꿔놓을 것”이라고 밝혔다.

집행위는 EU의 높은 신용등급을 활용해 금융시장에서 7500억 유로를 빌려 회원국에 지원하기로 했다. EU는 3대 국제신용평가사로부터 모두 최고등급을 받고 있다. 이 자금은 향후 플라스틱에 대한 세금, 디지털서비스세 도입 등 새로운 수입원을 통해 상환하기로 했다.

7500억 유로 중 3분의 2는 보조금, 나머지는 대출 방식으로 지원된다. 폰데어라이엔 위원장은 “자금지원은 모든 회원국에 제공될 예정”이라면서도 “코로나19로부터 가장 피해를 많이 받고 회복 필요성이 가장 큰 곳에 집중될 것”이라고 말했다.

다만 EU는 이번에 조성되는 코로나19 기금엔 이른바 ‘녹색조건’(green strings)이 뒤따를 것이라고 밝혔다. EU가 기후변화 대응을 위해 역점 추진하는 녹색정책인 그린딜을 코로나19 기금 사용의 핵심으로 둬야 한다는 뜻이다. EU는 지난해 말부터 그린딜을 최우선 과제로 추진하고 있다. 목표는 오는 2050년까지 실질적인 탄소 순배출 총량을 ‘0’으로 만드는 것이다.

집행위는 기금 지원이 EU가 올 초 내놓은 ‘피해를 끼치지 않는’(Do no harm) 원칙을 준수하는 산업에 집중돼야 한다고 강조했다. 기후변화의 주범인 탄소를 많이 배출하지 않는 산업에 자금을 지원해야 뜻이다. 이 계획대로라면 EU가 ‘Do no harm’ 분야로 분류하지 않은 석탄·석유 및 원자력발전 산업에는 원칙적으로 기금을 배정할 수 없다. 유럽 환경단체들은 이날 EU 집행위의 발표에 대해 일제히 환영의 뜻을 나타냈다.

유럽 각국 정부는 코로나19로 타격을 받은 항공과 자동차산업 등에 2조유로가 넘는 공적자금을 지원하고 있다. 항공과 자동차산업은 유럽에서 탄소배출량이 많은 분야로 꼽힌다. 각국 정부는 구제금융 대가로 해당 기업에 탄소배출량 감소 등 녹색조건도 의무화하지 않았다. 이 때문에 북유럽을 중심으로 한 일부 회원국들과 환경단체는 EU의 그린딜이 시작부터 차질을 빚을 수 있다고 반발해 왔다.

집행위가 내놓은 기금계획안이 확정되기 위해선 EU 27개 회원국의 동의와 유럽의회의 비준이 필요하다. EU 관련 전문매체인 유랙티브닷컴은 덴마크, 스웨덴, 오스트리아, 네덜란드 등 4개국의 설득 여부가 관건이라고 분석했다. 재정상태가 양호한 덴마크, 스웨덴, 오스트리아, 네덜란드 등은 EU의 ‘프루걸(frugal·검소한) 4개국’으로도 불린다. EU 예산이 주로 재정상태가 취약하고 모럴해저드(도덕적 해이)가 만연한 남부·동부유럽 국가들의 보조금으로 쓰이고 있다는 것이 이들 국가의 불만이다.

유랙티브닷컴은 기금계획안이 통과된 후에도 자금 지원여부를 결정하는 과정에서 갈등이 적지 않을 것으로 내다봤다. 기금 지원을 희망하는 회원국들은 집행위에 자금 신청을 해야 한다. 지원 여부는 27개 회원국의 다수결 투표로 결정된다.

런던=강경민 특파원 kkm1026@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