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정부가 글로벌 반도체 기업들을 대상으로 주요 정보 제출을 요구한 가운데 세계 최대 파운드리(반도체 위탁생산) 기업 대만 TSMC의 갈지(之)자 행보가 연일 외신들에 의해 보도되고 있다. 미 상무부가 정한 제출 시한이 열흘 앞으로 다가오면서 삼성전자SK하이닉스도 물밑 협상에 속도를 높이는 분위기다.

TSMC, 미 정부에 기밀 정보 제공하나 안 하나

30일 업계에 따르면 중국 경제매체 차이신은 지난 27일 "TSMC가 고객 기밀 정보를 미 정부에 제공하지 않을 방침"이라고 보도했다. 이 매체는 "TSMC는 미국의 정보 요청에 어떻게 대응할지 고심 중이지만 결국 고객 기밀 정보를 절대 넘겨주지 않을 것이라는 성명을 발표했다"며 "고객과 주주들의 이익을 해치는 어떤 행동도 하지 않겠다고 밝혔다"는 내용을 전했다.

하지만 그보다 앞선 지난 23일 대만매체 중시신문망은 "TSMC가 미 상무부 요구에 따라 반도체 공급망 정보를 제출키로 결정했다"고 보도했다. 지난 24일 중국 공산당 기관지 인민일보 산하 금융 미디어 중국기금보도 "TSMC가 정보 제출 시한인 다음 달 8일까지 미 상무부에 반도체 재고, 주문, 판매 등 공급망 관련 정보를 제출하기로 했다"고 알렸다.

중국기금보 보도에 따르면 TSMC 관계자는 미 상무부에 자료를 제출하는 것은 반도체 수급난 해결에 협조하기 위한 것으로, 회사는 그동안 관계 기관과 적극적으로 협력해 글로벌 반도체 공급상의 난관을 돌파하기 위해 노력해왔다고 밝혔다. 얼마 전까지 자료제출 여부를 묻는 질문에 고객 신뢰가 TSMC의 성공요인이라며 민감한 고객 정보를 절대 노출하지 않겠다고 했던 것과는 180도 달라진 내용이다.

불과 일주일 사이에 상반된 내용의 보도가 연이어 나오면서 TSMC 내부적으로 입장을 명확히 정리하지 못한 것 아니냐는 말이 나온다. 글로벌 반도체 쇼티지(공급난) 사태가 장기화하는 상황에서 파운드리 1위인 TSMC의 기조는 인텔뿐만 아니라 삼성전자, SK하이닉스에도 큰 영향을 끼칠 수 밖에 없을 것이라는 분석이다.

"기밀 유지는 반도체의 생명…외교 채널 총동원해야"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이 2020년 10월 네덜란드 에인트호번에 위치한 ASML 본사를 찾아 김기남 삼성전자 DS부문장 부회장과 EUV 장비를 살펴보는 모습 [사진=삼성전자 제공]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이 2020년 10월 네덜란드 에인트호번에 위치한 ASML 본사를 찾아 김기남 삼성전자 DS부문장 부회장과 EUV 장비를 살펴보는 모습 [사진=삼성전자 제공]
앞서 미국 정부는 지난달 24일 TSMC를 비롯해 삼성전자, SK하이닉스 등 반도체 업체들에 최근 3년간 제품별 매출액과 재고량, 유통 관련 정보 등 구체적인 현황을 제출하라고 요구했다. 제출 기일은 다음 달 8일. 이 질문들은 △회사의 주요 반도체 제품에 대해 각 제품의 2019년 리드타임(물품 발주 때부터 사용할 수 있을 때까지 기간)과 현재의 리드타임을 전체 및 각 공정별로 추정하라 △각 제품에 대해 톱3 고객사와 각 고객사에 대한 판매비중을 기술하라 등 회사의 최고 영업기밀에 속할 정도로 구체적인 내용을 묻는 질문이 대부분이다.

미 정부는 제너럴모터스(GM), 포드 등 미국 자동차 회사들의 차량용 반도체 수급난을 해결하기 위한 공급망 투명성 제고 차원이라는 입장이지만 미 상무부가 반도체 업계 현황을 손바닥 보듯 꿰뚫게 될 뿐 아니라 자료가 미국 업체에 누출될 경우 TSMC나 삼성전자 같은 외국 업체는 불리해질 수밖에 없다.

세계 최대 파운드리업체로서 애플, AMD 등 글로벌 팹리스 업체의 반도체 위탁생산 주문을 동시에 소화하는 TSMC는 그동안 고객사 기밀유지를 최우선으로 강조해왔다. 일단 우리 기업들은 미국 측 요구를 큰 틀에서 수용하되 고객사 정보 등 민감한 내용은 빼는 방법으로 물밑 협상을 진행 중인 것으로 알려졌다.

만약 TSMC가 자료를 제출할 경우 삼성전자가 받을 압력도 커질 것으로 보인다. 지난 21일 미 상무부는 인텔, GM, 인피니온, SK하이닉스 등이 관련자료를 제출키로 했다고 공개하면서 나머지 반도체 업체들을 직접 압박한 바 있어서다.
엔지니어들이 삼성전자 화성사업장 반도체 라인 사이를 걷는 모습 [사진=삼성전자]
엔지니어들이 삼성전자 화성사업장 반도체 라인 사이를 걷는 모습 [사진=삼성전자]
김기남 삼성전자 부회장은 지난 26일 '한국전자전 2021'에 참석해 "(반도체 정보 공개 요구에)여러 가지를 고려해 차분히 대응하고 있다"고 말했다. 이석희 SK하이닉스 사장도 같은 행사에서 "내부적으로 검토 중이고 정부와 소통하고 있다"고 원론적인 입장을 밝혔다.

산업통상자원부도 지난 25일 미 상무부와 반도체 관련 국장급 화상회의를 열고 적극 대응에 나섰다. 반도체 파트너십을 비롯한 양국의 산업협력 대화채널 신설을 논의한 것은 물론 국내 반도체 업계의 우려를 미국에 전달한 것으로 알려졌다.

업계 관계자는 "TSMC와 미 정부와의 관계는 경제적 측면을 넘어 지정학적인 문제로 접근해야 한다"며 "미중 갈등이 무역을 넘어 군사·안보 차원으로 확대되는 상황이기 때문에 TSMC가 미 정부의 요구에 어떤 방식으로든 화답하게 될 것"이라고 내다봤다.

이어 "삼성전자 등 한국 기업이 취할 수 있는 해결책은 미국 투자를 늘리면서 정치권 인사를 설득하는 방법이 있다"며 "고객 기밀 유지는 반도체 기업의 생명이라고 할 수 있기 때문에 국가 외교적 채널을 총 동원해 공동 대응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강경주 한경닷컴 기자 qurasoha@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