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6월 50대 취업자 수가 652만 명으로 1965년 통계 작성 후 처음으로 일자리 점유율 1위에 올랐다. 서울 청계천 인근 대기업에 근무하는 50대 회사원들이 점심식사를 마치고 산책하고 있다. /신경훈 기자  khshin@hankyung.com
지난 6월 50대 취업자 수가 652만 명으로 1965년 통계 작성 후 처음으로 일자리 점유율 1위에 올랐다. 서울 청계천 인근 대기업에 근무하는 50대 회사원들이 점심식사를 마치고 산책하고 있다. /신경훈 기자 khshin@hankyung.com
어느 나라에나 ‘황금 세대’는 있다. 고도성장기에 태어나 이전 세대보다 더 많은 과실을 딴 세대다. 미국의 베이비붐 세대(1945~1965년생), 일본의 단카이 세대(1947~1949년생)가 그랬다.

한국에선 ‘586세대(50대·80년대 학번·60년대생)’가 이런 세대로 꼽힌다. “모든 면에서 행운을 타고났다”(이철승 서강대 사회학과 교수)는 평가를 받는 세대다. 전쟁과 빈곤, 외환위기, 취업난, 부동산 가격 폭등 등을 모두 피한 586세대는 30대로 접어들면서 정치·경제·사회 각 분야에서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해 50대가 되면서 꽃을 피웠다. “한국 사회를 20년간 독점한 세대”(박용진 더불어민주당 국회의원)가 탄생하게 된 시대 배경을 스스로 ‘586 화이트칼라의 전형’이라고 말하는 대기업 부장 A씨의 삶을 통해 돌아봤다.

‘황금세대’ 기회가 널렸다

A씨는 한국이 고도성장기에 막 들어선 1964년에 태어났다. 3년 전 박정희 정부가 내놓은 ‘제1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이 조금씩 성과를 내던 때였다. 살림살이가 나아진 덕분에 집집마다 아기 울음소리가 끊이지 않았다. 1960년대 출생아 수는 1965년(99만6052명)을 제외하고 매년 100만 명을 넘겼다. 지난해 출생아 수(32만6900명)의 세 배가 넘는 수치다. 1960년대생은 총인구의 16.6%(860만 명·2018년 기준)를 차지한다. 10년 단위로 끊었을 때 전체 세대 중 가장 많다.

경남 울주군(현 울산광역시)에서 작은 양복점을 하던 A씨의 아버지는 자식들에게 “공부만이 살 길”이라고 입버릇처럼 말했다. 그리 풍족한 형편은 아니었지만 부모의 교육열 덕분에 A씨는 공부에만 매달릴 수 있었다. 매년 100만여 명이 대학 문턱을 두드릴 만큼 경쟁은 치열했다. 하지만 전두환 정부가 1980년 과외를 전격 금지하고 본고사를 없앤 덕분에 집안에 돈이 있건 없건 모두가 같은 선상에서 출발했다. 주요 대학들이 잇따라 분교를 설립하고, 대학 입학 정원의 30%를 늘리는 ‘졸업정원제’가 더해지면서 1980년 61만 명이었던 대학생 수는 1985년 136만 명으로 두 배 넘게 늘었다.

공부를 곧잘 했던 그는 수도권 사립대 83학번이다. 그는 “지금은 부모가 아이의 스펙을 관리해주고 비싼 과외를 시켜야 좋은 대학에 갈 수 있지만 그때는 학생 스스로 교과서 위주로 열심히 공부해 서울대에도 갈 수 있었다”고 말했다.
[창간 55주년 기획] 추천서에 이름 쓰면 취업, 집 샀더니 몇배 뛰어…천운을 타고난 586
추천서에 이름만 적으면 취업

1987년 초 군복무를 마치고 돌아온 A씨를 맞은 건 화염병과 최루탄이었다. ‘강성 운동권’이 아니었던 그도 선배와 동료들의 손에 이끌려 수시로 시위 현장을 찾았다. 이들이 주도한 ‘6월 민주항쟁’은 결국 대통령 직선제 도입을 골자로 하는 6·29선언을 이끌어냈다. A씨는 “한국 사회를 변화시키는 데 보탬이 됐다는 자부심은 평생 갈 것 같다”고 했다.

학점은 그저 그랬다. 하지만 어렵지 않게 취업할 수 있었다. 그가 사회인이 된 1990년은 고도성장의 막바지를 달리던 때였다. 당시 경제성장률은 9.8%에 달했다. 몸집 불리기에 나선 기업들이 앞다퉈 대졸 인재를 찾다보니 사실상 취업준비생이 우위에 있는 시장이 됐다. A씨는 “취업이 잘 되다 보니 요즘 대학생들처럼 별도의 스펙을 쌓는 학생은 거의 없었다”고 했다.

명문대 졸업 예정자들은 학점이 나빠도 원하는 기업을 골라서 갔다. 학과 사무실에 비치된 교수 추천서에 자신의 이름만 쓰면 면접전형까지는 쉽게 올라갈 수 있었다. 기업 인사담당자들이 학교 앞 호프집으로 학생들을 불러 모아 지원을 독려하기도 했다. 1990년 전체 실업률은 2.4%였다. 당시엔 청년 실업률을 따로 집계하지 않았다. 지난해 전체 실업률은 3.8%였고, 청년 실업률은 9.5%에 달했다.

기업 외에 학계, 정계 등 다른 길도 넓었다. A씨는 “한 다리 건너면 아는 사람 중에 국회의원만 3명 있고 대학교수는 10명이 넘는다”고 했다. 대학에 들어가지 못한 그의 고교 동창들의 삶도 팍팍하지만은 않았다. 대부분 중소기업에 들어가 아직까지 현직으로 뛰고 있다.

5년 만에 월급 두 배로

A씨의 직장생활은 순탄한 편이었다. 저유가·저금리·저달러의 ‘3저 호황’에 힘입어 1990~1995년 명목임금상승률은 13.7%에 달했다. 5년이 지나면 급여가 두 배 가까이 올랐다는 얘기다. 2017년(3.8%)과 2018년(5.3%) 임금상승률의 2~3배에 달하는 수준이다.

‘내 집 마련’도 지금보다 훨씬 쉬웠다. 1988년 주택 200만 가구 건설과 1989년 경기 분당·일산 등 1기 신도시 건설 등 공급 확대 정책에 힘입어 1990년대 중반까지 아파트가 쏟아져 나온 덕분이다. 이로 인해 1991년부터 1999년까지 전국 주택 매매가는 14.2% 떨어졌다. 1998년에는 외환위기 여파로 전년 대비 집값이 12.4% 쪼그라들기도 했다. 수혜자는 당시 30대 가장이 된 586세대에 집중됐다. A씨도 대출을 끼고 1998년 분당 32평 아파트를 1억원에 매입했다. 2000년부터 2018년까지 전국 아파트값은 97% 올랐다. 이 중 수도권은 121% 상승했다.

상당수 586세대는 외환위기도 피했다. 당시 구조조정의 타깃은 그들보다 고참인 부장·차장이었다. 대리·과장급을 구조조정 대상으로 삼은 기업은 많지 않았다. 2~3년 뒤 외환위기를 이겨낸 기업들이 다시 몸집 불리기에 나서자 구조조정 여파로 비어 있던 부장·차장 자리를 이들이 맡기 시작했다. 외환위기는 이들에게 고속 승진을 안겨준 ‘축복’이었던 셈이다.

생산직 상황도 비슷했다. 외환위기가 터지기 훨씬 전에 입사한 이들의 신분은 대부분 정규직이다. 비정규직 일자리는 1998년 파견근로법이 제정되면서 급증하기 시작했다. 노동시장의 기득권이 된 이들은 각 기업 노동조합의 핵심이 됐다. 지난해 기준 민주노동조합총연맹 금속노조 조합원을 연령별로 보면 50대가 39.2%로 가장 많았다.

정년연장 혜택까지…

A씨도 여느 부모처럼 자식 교육에 돈을 쏟아부었다. 대치동 학원에 갖다 바친 돈만 수천만원에 달한다고 했다. A씨의 딸은 지난해 서울에 있는 대학에 들어갔다. 2016년 시행된 ‘정년 60세’는 그에게 구세주가 됐다. A씨는 “정년연장이 안 됐다면 만 55세가 되는 올해 회사를 그만둬야 했다”며 “당장 딸 학비를 어떻게 마련할지부터 고민했을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최근 뉴스를 보니 정년이 65세로 늘어날 것 같다”며 기대를 내비치기도 했다. 윤평중 한신대 철학과 교수는 “586세대가 민주화에 기여한 공은 인정해야겠지만 이후 사회 각 분야에서 ‘장기 집권’ 체제를 구축하면서 유기적인 세대 순환이 막힌 모습”이라며 “그 결과 청년들이 역사상 최초로 ‘부모보다 못 사는 세대’가 될지를 걱정하는 나라가 됐다”고 말했다.

성수영/서민준 기자 syoung@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