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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경제

  • 성수영 기자
    성수영 기자 문화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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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한국경제신문 문화부 기자입니다. 미술과 문화재, 문화체육관광부를 취재합니다. 쉽고 재미있게 쓰겠습니다.

  • "용호의 웅장한 기세"…죽음 앞둔 안중근의 유묵, 경매 나왔다

    “용과 호랑이의 웅장한 형세가, 어찌 지렁이와 고양이 따위의 자태를 일삼으랴! 경술년 3월 여순 감옥에서, 대한국인 안중근 씀.” 안중근 의사가 형장의 이슬로 사라지기 며칠 전에 남긴 유묵(遺墨)이 국내 경매에 나왔다. 자신의 삶을 돌아보는 듯한 내용을 시원스럽고 당당한 필치로 쓴 뒤 옆에 지장을 찍은 작품으로, 낙찰 추정가는 5억~10억원이다. 서울옥션은 오는 20일 ‘제 176회 미술품 경매’를 열고 안중근 의사 유묵을 비롯한 총 78점, 68억원 규모의 작품을 경매에 부친다. 유묵은 1910년 3월 안 의사가 사형 집행 며칠을 앞두고 쓴 작품이다. 일제시대 일본으로 건너간 후 일본 교토의 개인 소장가가 가지고 있었던 것으로 알려졌다. 앤디 워홀의 ‘달러 사인’(추정가 6억~12억원), 쿠사마 야요이의 '호박'(6억9000만~10억원), 박서보 화백의 수억원대 ‘컬러 묘법’ 작품 등도 같은 경매에서 새 주인을 찾는다. 조선 후기 필통인 ‘백자청화진사투각산수화훼문사각필통’(2500만~1억원) 등 고미술 작품들과 구한말 채용신이 그린 독립운동가 최전구의 초상과 칙명 등 관련 유물(5000만~1억원)도 함께 나왔다. 경매는 20일 오후 4시 서울 신사동 서울옥션 강남센터에서 열리며, 경매 당일까지 같은 건물 5~6층에서 무료로 관람 가능하다. 다음날인 20일에는 케이옥션의 12월 경매가 열린다. 작품 수는 101점, 총액은 70억원 가량이다. 이번 경매에서 추정가가 가장 높은 작품은 김환기가 뉴욕에서 작업하던 시절 그린 십자 구도의 작품 '4-VI-69 #65'. 추정가는 7억5000만~20억원이다. 해외 유명 작가의 작품으로는 데미언 허스트의 '무제'(5억8000만~9억원), 쿠사마 야요이의 'Aching Chandelier'(4억6000만~8억원), 아야코 록카쿠의

    2023.12.11 16:58
  • "실물이랑 너무 달라"…소개 잘못 했다 참변 당한 사연 [성수영의 그때 그 사람들]

    “왕이시여, 제발 자비를!” 1540년 영국 런던탑 뒤 처형장. 처형이 집행되는 순간까지 왕에게 용서를 구하던 수석장관 토머스 크롬웰의 목이 허무하게 떨어졌습니다. ‘영국의 2인자’로 불리며 왕 바로 다음가는 권세를 누리던 크롬웰이 처형당한 이유는 딱 하나. 왕의 취향에 맞지 않는 여성을 왕비 감으로 소개했기 때문이었습니다. 한 장의 초상화만 아니었더라면 이런 사달은 나지 않았을지도 모릅니다. 중세 유럽의 왕족들은 보통 외국 왕족과 결혼하기 전 초상화를 교환해 서로의 외모를 확인했습니다. 요즘으로 치면 선을 보거나 소개팅을 하기 전 상대방의 사진을 보는 것과 비슷했지요. 그런데 결혼 전 왕이 받아본 그림은 그의 마음에 너무나 쏙 들었습니다. 초상화를 보자마자 사랑에 빠질 만큼요. 그림을 본 왕이 아주 기분이 좋아져서, 궁정 음악가들에게 당장 음악을 연주하라고 시켰다니 말 다 했지요. 하지만 실제로 왕비의 실물을 접한 왕은 크게 실망했습니다. 초상화와 실물이 너무 달랐거든요. 화가 잔뜩 난 왕은 신하에게 “바다 건너에서 웬 말같이 생긴 여자가 왔다”며 화를 냈습니다. “왕에게 못난 여자를 소개하다니….” 분노로 이성을 잃은 왕은 주선자인 크롬웰을 사형시켰습니다. “특별히 고통스럽게 집행하라”는 말까지 덧붙이면서요. 주선자가 처형당했으니 이제 초상화를 그린 화가의 차례였습니다. 오늘은 그 남자, 영국 왕실 화가를 지낸 거장 한스 홀바인과 ‘난봉꾼 왕’으로 불렸던 헨리 8세(1491~1547, 기사에서는 헨리로 지칭). 그리고 그의 여섯 아내에 얽힌 역사 이야기를 그림과 함께 풀어보겠습니다. 천재 독일인 아저씨, 왕의 화가가 되다 500년 전 평범한 계급

    2023.12.09 10:21
  • 보는 것만으론 2% 부족…먹고, 듣고, 맡는 전시가 왔다

    미술에 푹 빠진 사람들은 날 좋고 볕 좋은 봄·가을만큼이나 겨울을 사랑한다. 봄·가을에는 주로 대중이 좋아할 만한 전시를 여는 갤러리들이 ‘겨울 비수기’가 오면 앞다퉈 예술성 있는 유망 작가들을 소개하기 때문이다. 이때 열리는 전시에는 각 화랑의 색깔과 내공, 미술계 최신 조류 등이 뚜렷이 드러나 ‘보는 맛’이 있다고 애호가들은 말한다. 연말에는 영화관·공연장을 찾는 사람이 늘어 전시장이 한적해지는 것도 겨울만의 장점이다. 올 연말에도 서울 시내 곳곳에서 젊은 작가들의 참신한 작품들이 관객을 기다리고 있다. 오감을 자극하는 전시가 특히 눈에 띈다. 작품을 실제 조각내서 먹는 전시(갤러리신라)부터 음악을 듣고 향기를 맡으며 작품을 감상하는 작품전(BHAK갤러리), 사람의 신체와 촉각을 주제로 꾸민 전시(지갤러리)가 열리고 있다. ○씹고 맛보고 즐기는 현대미술 서울 삼청동 갤러리신라에서는 멕시코 작가 안드레아 페레로(32)의 전시가 열리고 있다. 전시장에는 그리스·로마 시대 신전의 폐허를 연상시키는 흰색과 분홍색 조각이 가득 널려 있다. 얼핏 보면 대리석이지만, 실제로는 화이트초콜릿이다. 이준엽 디렉터는 “국내 첫 식용 조각 전시”라고 설명했다. 페레로가 이렇게 특이한 작품을 선보인 이유를 풀어서 설명하면 이렇다. 작가의 고향은 멕시코. 16세기 스페인에 정복당해 오랫동안 식민 지배를 받은 나라다. 현대 멕시코의 인종과 언어(스페인어), 종교(가톨릭) 등에 스페인의 흔적이 짙게 남아 있는 이유다. 독립한 지 200년이 넘었지만 멕시코는 지금도 경제·문화적으로 미국과 유럽 영향권에 있다. 작가는 이런 상황에서 벗어나려면 서양 문화를 이겨내는 일종

    2023.12.06 19:00
  • 피카소와 고야가 존경한 미술사에서 손꼽히는 천재 디에고 벨라스케스

    디에고 벨라스케스(1599~1660)는 바로크 시대를 대표하는 거장이다. 세비야에서 태어난 그는 불과 24세 때 스페인 왕 펠리페 4세에게 발탁돼 평생 왕실 궁정화가로 지냈다. ‘서양미술사에서도 손꼽히는 천재’라는 평가를 받을 정도로 뛰어난 재능 덕분이었다. 벨라스케스는 모든 종류의 그림에 능했다. 그중에서도 사실적이고 상대의 심리를 꿰뚫어 보는 듯한 초상화는 독보적이라는 평가다. 파블로 피카소와 프란시스코 고야, 에두아르 마네, 살바도르 달리 등 후대의 무수한 거장들이 그의 영향을 받았다. 하지만 미술 시장에서는 존재감이 크지 않다. 주요 작품 대부분을 스페인 프라도미술관과 오스트리아 빈미술사박물관 등 세계 최고 미술관이 소유하고 있어 시장에 나올 일이 없기 때문이다. 내년 2월 소더비 뉴욕 경매에 벨라스케스의 작품 ‘이사벨 데 보르본’이 출품된다는 소식이 최근 미술계에서 화제를 모은 건 이런 이유에서다. 이 작품은 벨라스케스가 펠리페 4세의 부인 이사벨 데 보르본을 정성들여 그린 작품이다. 1808년 나폴레옹 군대가 스페인에서 약탈해온 뒤 프랑스 귀족과 영국 은행가의 손을 거쳐 한 백만장자 가족이 보유하고 있었고, 파리 루브르박물관에도 전시된 적이 있다. 예상 낙찰가는 3500만달러(약 455억원)다. 성수영 기자 syoung@hankyung.com

    2023.12.06 18:04
  • 용산구-리움미술관, 지역 청소년들에게 건축·미술 교육한다

    서울 용산구와 삼성문화재단 소속 리움미술관이 손을 맞잡고 ‘청소년과 함께하는 아름다운 건축여행’ 프로그램을 시작했다. 용산구 청소년들을 리움미술관으로 초청해 건축과 전시, 미술 작품에 대해 가르쳐주는 사회공헌사업이다. 6일 용산구와 리움미술관에 따르면 프로그램은 11월 7일과 21일, 12월 5일 등 3회에 걸쳐 이미 가동됐다. 용산구 신광초, 청파초 5·6학년 학생과 교사 등 약 80명이 참여했다. 학생들은 리움미술관 건축물에 대한 설명을 들은 뒤 강서경전을 관람했다. 건축물 설명은 강유원 리움미술관 책임이 3개의 건물(M1, M2, 삼성아동교육문화센터)을 설계한 3명의 건축가 마리오 보타, 장 누벨, 렘 쿨하스의 이야기 등을 설명하는 식으로 진행됐다. 리움미술관 M2 전시장의 전시박스가 세계 최초 ‘부식되는 스테인레스 스틸’로 만들어졌다는 사실, 삼성아동교육문화센터 안 공중에 떠 있는것처럼 설치돼 있는 ‘블랙박스 전시장’이 특히 학생들의 관심을 끌었다고 한다. 전시 설명은 리움미술관 예술교육강사가 초등학생용 전시연계 워크북을 활용해 프로그램을 진행했다. 워크북은 학생들이 현대미술을 조금 더 친숙하게 이해할 수 있도록 리움미술관이 만든 교재다. 행사의 인솔 책임자인 김병수 용산구청 건축과 건축기획팀장은 “용산구의 지역명소를 알아가며 애향심과 자부심을 기를 수 있도록 기획했고, 용산구의 랜드마크인 리움미술관이 용산구와 적극적으로 협업해 아이들의 눈높이에 맞춰 프로그램을 진행해 주셔서 감사하다”고 전했다. 류문형 삼성문화재단 대표이사는 “앞으로도 더 많은 청소년들이 미술관을 찾아올 수 있도록 노력하겠다”고 답했다. 용산구와 리움

    2023.12.06 09:21
  • 작품 부숴 먹는 전시회까지?… '발칙한' 전시들이 몰려왔다

    겨울은 미술 애호가들이 사랑하는 계절이다. 봄·가을에는 대중성 높은 전시를 열던 갤러리들이 ‘겨울 비수기’를 맞아 예술성 높은 유망 작가들을 소개하기 때문이다. 이때 열리는 전시들에는 각 화랑의 색깔과 내공, 미술계 최신 조류 등이 뚜렷이 드러나 ‘보는 맛’이 있다는 게 애호가들의 얘기다. 사람들이 연말을 맞아 영화관·공연장으로 몰리는 덕분에 전시장은 상대적으로 한적하다는 것도 겨울만의 장점이다. 올해 연말도 어김없이 서울 시내 곳곳에서 젊은 작가들의 참신한 작품들이 관객을 기다리고 있다. 시각 외에도 미각·청각·후각·촉각을 함께 자극하는 전시들이 특히 눈에 띈다. 작품을 실제로 조각내서 먹는 경험(갤러리신라)부터 음악을 듣고 향기를 맡으며 작품을 보는 경험(BHAK), 사람의 신체와 촉각을 주제로 한 전시(지갤러리)를 모았다. 씹고 맛보고 즐기는 현대미술 서울 삼청동 갤러리신라에서는 멕시코 작가 안드레아 페레로(32)의 전시가 열리고 있다. 전시장에는 그리스·로마 시대 신전의 폐허를 연상시키는 흰색과 분홍색의 조각들이 가득 널려 있다. 대리석으로 만들었나 싶지만, 실은 이 조각들의 재료는 모두 화이트초콜릿이다. 이준엽 디렉터는 “국내 최초의 식용 조각 전시”라고 설명했다. 페레로가 이렇게 특이한 작품을 만든 이유를 풀어서 설명하면 이렇다. 작가의 고향은 멕시코. 16세기 스페인에 정복당해 오랫동안 식민 지배를 받았던 곳이다. 현대 멕시코의 인종과 언어(스페인어), 종교(카톨릭) 등에 스페인의 흔적이 짙게 남아 있는 이유다. 식민 지배에서 독립한지 200년이 넘은 지금도 멕시코는 경제·문화적으로 북미 지역과 유럽의 영향권 아래에 있다. 이

    2023.12.05 09:18
  • 팔순의 오로라 화가 "그림은 봤을 때 그 자체로 아름다워야"

    전명자 작가(81)는 60여 년 전 홍익대 서양화과에 들어간 이후 자신이 사랑하는 일상의 풍경을 줄곧 그려왔다. 아파트 실내와 창밖의 풍경, 아이들의 모습, 여행의 기록…. 흘러가는 세월만큼이나 그의 작품과 명성은 꾸준히 쌓여갔고, 마침내 서울여대 미술대학 교수가 됐다. 평온한 시간이 흘러가던 50대의 어느 날. 그는 “다시 한번 새로운 도전을 해보고 싶다”며 프랑스 파리로 유학을 떠났다. 교수직을 던지고 가족도 한국에 둔 채. 그렇게 떠난 길에서 전 작가는 그간 보지 못했던 아름다운 풍경들을 만났다. 형언할 수 없을 정도로 신비로운 빛을 뿜어내는 북구의 오로라, 파리 거리의 낭만, 이글거리는 태양처럼 강렬한 이탈리아 토스카나의 해바라기밭…. 그는 이 광경들을 합쳐 화폭에 담았다. 서울 인사동 선화랑에서 열리고 있는 개인전 ‘재현과 현전(現前)의 경계에서’는 그 결과물을 모아놓은 자리다. 전 화백의 별명은 ‘오로라 화가’다. “1995년 노르웨이와 아이슬란드 여행에서 오로라를 처음 본 이후 내 삶과 작품이 완전히 바뀌었다”고 입버릇처럼 말해서다. 그의 작품에서 두드러지는 몽환적인 초록색과 파란색도 오로라에서 모티브를 얻은 것이다. 하늘에 펼쳐지는 오로라와 함께 유럽의 성당, 악기를 연주하는 사람들, 길거리를 걷는 파리 시민 등 공존할 수 없는 요소들이 시공을 초월해 뒤섞여 있는 것도 전 작가 작품의 특징이다. 이렇게 그린 작품들은 다소 통속적이면서도 이해하기 쉽다. 전 작가는 “그림은 말로 설명할 필요 없이, 봤을 때 그 자체로 아름다워야 한다고 생각한다”며 “관람객들이 그림을 통해 내가 경험한 행복을 조금이라도 느낄 수 있기를 바란다”고 말했

    2023.11.29 18:08
  • 이응노·키퍼…'노잼 도시' 대전 바꾼 '꿀잼 전시'

    ‘노잼 도시’. 대전의 또 다른 이름이다. 도시 규모와 살림살이에 비해 볼거리와 놀거리가 적다 보니 이런 별명이 붙었다. 대전시도 이런 사실을 잘 안다. 그래서 ‘노잼 도시 탈출 계획’을 세우고 핵심 해법으로 미술을 꼽았다. 수준 높은 미술 전시를 통해 시민들의 ‘문화 목마름’을 해소하는 동시에 다른 지역 관광객도 끌어모으겠다는 전략이다. 변화는 시작됐다. 대전시립미술관과 이응노미술관은 서울에서도 만나기 힘든 ‘꿀잼 전시’로 사람들을 유혹하고 있다. 두 달 전 개소한 문화공간 헤레디움은 서울을 제치고 유치한 현대미술 거장 안젤름 키퍼(77)의 국내 첫 개인전을 열고 있다. 서울에 이은 ‘제2의 미술수도’를 꿈꾸는 대전의 ‘시그니처 전시’를 모았다. ‘미술 한류 원조’ 이응노를 아십니까고암 이응노(1904~1989)는 ‘미술 한류(韓流)’의 원조로 꼽히는 화가다. 1958년 54세에 프랑스 파리에 진출해 현지 미술계의 ‘슈퍼스타’가 됐다. 하지만 이응노의 국내 인지도는 국제적 위상에 한참 못 미친다. 작품세계 전반을 돌아보는 전시도 드물었다. 사연 많은 그의 인생 탓이다. 이응노는 1967년 중앙정보부가 발표한 동백림(동베를린) 사건으로 2년이 넘는 옥고를 치렀다. 아내 박인경 주도로 1977년 윤정희·백건우 부부가 납북될 뻔한 사건에 연루된 적도 있다. 정부는 그의 입국과 국내 전시 및 작품 거래를 한때 금지하기도 했다. 그래서 지금 이응노미술관에서 열리는 ‘동쪽에서 부는 바람, 서쪽에서 부는 바람’ 전시가 더 귀하다. 그의 작품세계를 두루 살펴볼 수 있는 60여 점이 전시돼 있다. 대부분 국립현대미술관과 아라리오뮤지엄, 프랑스 퐁피두센터 등에서 빌려온 것이다.

    2023.11.28 15:56
  • '미술 한류 원조' 이응노展, 프랑스서 미공개작까지 공수

    고암 이응노(1904~1989)는 '미술 한류(韓流)'의 원조로 꼽히는 화가다. 1958년 54세의 나이로 세계 미술의 중심지인 프랑스 파리에 진출해 현지 미술계의 ‘슈퍼스타’가 됐다. 당대 최고 화랑이었던 파케티 갤러리의 러브콜을 받으며 계약을 맺었고, 전시를 할 때마다 콧대 높기로 유명한 프랑스 평론가들의 칭송을 받았다. 이응노가 파리에 동양미술을 가르치는 학교를 열었을 때 수강생이 구름처럼 몰린 것도 당연한 일이었다. 1989년 이응노의 장례식에는 수많은 프랑스 문화예술인들이 모여들어 조의를 표했다. 하지만 이응노의 국내 인지도는 국제적 위상에 한참 못 미친다. 작품세계 전반을 돌아보는 전시도 드물었다. 사연 많은 인생 탓이었다. 이응노는 1967년 중앙정보부가 발표한 동백림(동베를린) 사건으로 2년 반의 옥고를 치렀다. 아내인 박인경의 주도로 1977년 윤정희·백건우 부부가 납북될 뻔한 사건에 연루된 적도 있었다. 정부는 그의 입국과 국내 전시 및 작품 거래를 한때 금지시키도 했다. 1983년 프랑스로 귀화한 이응노는 끝내 고국에 돌아오지 못하고 1989년 1월 10일 파리에서 눈을 감았다. ‘동쪽에서 부는 바람, 서쪽에서 부는 바람’은 모처럼 열린 이응노의 작품세계 전반을 조명하는 전시다. 이응노를 기리는 미술관인 대전 이응노미술관에서 그의 탄생 120주년을 기념해 마련됐다. 60여점의 전시작 중 대부분은 국립현대미술관과 아라리오뮤지엄, 프랑스 퐁피두 센터, 체르누스키 파리시립 아시아미술관 등 국내외 유수의 미술관에서 빌려온 것. 김지윤 학예연구사는 “이응노가 프랑스로 이주하기 전 작품과 이후 작품을 골고루 소개하는 전시”라며 “퐁피두센터가 소장한 작품 4점 등 국

    2023.11.28 10:16
  • 절정의 세련미 자랑했던 기하추상의 '컴백'

    역사는 승자의 기록이다. 미술사도 마찬가지다. 한국 추상미술사의 승자는 단색화였다. 한국 추상미술사의 등장인물은 단색화가들로 채워졌고, 이들이 시도한 앵포르멜(즉흥적 비정형 회화)이 주요 사건으로 다뤄졌다. 단색화가들과의 각축전에서 밀려난 일단의 사람들 가운데는 기하추상화가가 있다. 기하학적 추상미술이라고도 하는데 점과 선 그리고 면으로 화면을 구성하는 방식을 쓴다. 기하추상은 1920년대부터 1970년대까지 한국 미술의 중요한 한 축이었다. 몬드리안, 칸딘스키 등에게 큰 영향을 받았다. 김환기 유영국 윤형근 박서보 하종현 등 한국 미술의 주요 작가들이 거쳐 간 사조이기도 하다. 기하추상은 어쩌면 한국 미술을 대표하는 사조가 될 수도 있었다. 기하추상이 대중의 관심에서 멀어진 이유는 이해하기가 너무 어렵다는 것이었다. “관객과의 소통을 거부한다”는 지적이 잇달았다. 미술계에서도 곱지 않은 시선을 받았다. 단색화와 민중미술도 기하추상을 비판했다. 한국적인 정신을 강조하는 단색화, 현실 참여를 강조하는 민중미술과 달리 기하추상은 서구적이고 장식적이라고 평가했다. 기억 저편으로 잊힌 기하추상이 다시 대중에게 다가왔다. 국립현대미술관 과천관에서 열리고 있는 ‘한국의 기하학적 추상미술’이다. 한국 대표 추상미술가 47인의 작품 150여 점과 각종 기록을 모았다. 전시를 본 일반 관객은 물론 미술 관계자 사이에서도 “그 옛날 한국 미술이 이렇게 세련됐다는 사실을 몰랐다”는 감탄이 나온다. 1929년 단성사가 영화 홍보를 위해 만든 ‘단성주보’ 300호의 표지에 등장하는 기하학적인 추상 이미지가 대표적이다. 전시를 기획한 전유신 국립현대미

    2023.11.26 18:11
  • 새로운 '광개토대왕릉비 탁본' 프랑스서 발견

    고구려 광개토대왕(재위 391~412)의 업적을 기리기 위해 세운 비석인 광개토대왕릉비 탁본(사진)이 프랑스에서 새로 발견됐다. 23일 학계에 따르면 박대재 고려대 한국사학과 교수는 24일 프랑스 고등학술기관인 ‘콜레주 드 프랑스’에서 열리는 학회에서 이전에 발표된 적이 없는 광개토대왕릉비 탁본을 소개할 예정이다. 박 교수에 따르면 이 탁본은 지난해 말 콜레주 드 프랑스가 소장품을 점검하다가 발견한 것으로, 총 4장으로 구성돼 있다. 탁본 연대 및 소장 시기는 1910년 안팎으로 추정된다. 광개토대왕릉비는 고구려의 두 번째 수도인 중국 지린성 지안에 414년께 세워진 비석이다. 아들인 장수왕이 만들었다고 전해지며 높이 6.39m의 돌에 1775자 규모의 글자가 새겨져 있어 동아시아 최대 규모다. 지금까지 서구권에서 보유하고 있는 탁본으로는 프랑스 국립도서관 소장품이 유일한 것으로 알려져 있었다. 이번에 새롭게 발견된 탁본은 불교 미술을 연구한 학자 앨리스 게티(1865~1946)가 제작한 것으로 추정된다. 성수영 기자 syoung@hankyung.com

    2023.11.23 18:54
  • [이 아침의 화가] 조각에 드로잉도 마스터…교과서가 된 그의 작품

    “살아서 자기 나라 미술 교과서에 실린 작가.” 미국 출신 작가 로니 혼(68)이 현대미술계에서 차지하는 위상이 얼마나 높은지는 이 한마디로 설명할 수 있다. 예일대 조형학과를 졸업하고 바로 작품 활동을 시작한 그는 젊은 시절부터 사진, 조각, 드로잉, 에세이 등 손대는 매체마다 줄곧 미술계와 시장의 주목을 받아왔다. 혼의 작품 세계를 하나로 관통하는 주제는 사람과 사물, 자연 등이 맺는 ‘관계’. 아이슬란드의 빙하를 모티브로 만든 대표작 ‘유리 조각 연작’도 마찬가지다. 국내에서는 방탄소년단(BTS)의 RM 소장품으로 유명한 작품이다. 혼은 이 연작에서 온천과 빙하 등 아이슬란드 대자연을 주제로 지구온난화 등 인간과 자연이 맺는 관계를 표현했다. 국내에서 작품을 보려면 경기 용인시 호암미술관에서 열리고 있는 소장품전에 가면 된다. 전시는 내년 1월 21일까지. 서울 삼청동 국제갤러리에서 열리고 있는 혼의 개인전은 수채화를 통해 관계를 탐구한 작품들이 나와 있다. 그의 작품 15점은 각각 그림 8개가 한 세트로 이뤄졌다. 서로 다른 존재의 공통점과 차이점이 관계를 어떻게 바꾸는지에 대한 고민을 작품에 담았다는 설명이다. 전시는 12월 31일까지. 성수영 기자 syoung@hankyung.com

    2023.11.23 18:14
  • '잊혔던 실험미술 선구자' 정강자, 화가로 다시 보다

    정강자(1942~2017)는 지난 1년간 가장 극적으로 재조명을 받은 작가다. 1960년대 국내 최초로 누드 퍼포먼스를 벌이며 사회적인 파장을 불러일으켰을 때만 해도 그는 미술계 최고의 ‘이슈 메이커’였다. 하지만 쏟아지는 비난과 조롱을 피해 10여년간 해외로 이주했다. 미술계는 그를 금세 잊었고, 1980년대 다시 한국으로 돌아와 타계할 때까지 꾸준히 작품 활동을 이어갔지만 큰 주목을 받지 못했다. 반전이 찾아온 건 올해 국립현대미술관과 미국 구겐하임 미술관이 ‘한국 실험미술 1960-70년대’ 전시를 개최하면서다. 관객들이 전시에서 가장 눈에 띄는 작품으로 꼽은 작품이 바로 정강자의 설치작품 ‘키스 미’. 한국 실험미술에 대한 재평가 바람과 여성 작가들이 조명되는 최근 세계 미술계의 분위기가 겹치면서 그는 순식간에 다시 ‘핫한 작가’가 됐다. 지난달 영국 런던에서 열린 프리즈 아트페어에서 주요 여성 작가를 기리는 ‘모던 우먼’ 섹션에 정강자가 유일한 아시아인 참여 작가로 선정됐던 것도 이런 맥락 덕분이다. 서울 원서동 아라리오갤러리에서 열리고 있는 ‘정강자: 나를 다시 부른 것은 원시였다’는 그의 작품세계를 재평가하는 노력의 일환이다. 이번 전시에는 정강자가 1995년부터 2010년까지 제작한 회화 40점이 나왔다. 지하 1층과 1층에는 정강자의 1990년대 작품들이 걸려 있다. 작가가 중남미와 아프리카, 서남아시아, 남태평양 등 세계 각지를 여행하며 받은 영감을 투영한 그림들이다. ‘뜨개질로 우주를’(1996),‘거미’(1995), ‘무제’(1997) 등 이국적이면서도 초현실적인 화풍의 작품들이 눈에 띈다. 반면 3~4층의 2000년대 작품들에서는 만물을 반원이라는 모양으로 설명하려

    2023.11.23 09:05
  • 몬드리안의 강림? 100년 전 한국의 이 세련된 잡지 표지를 보라

    역사는 승자의 기록이다. 미술사도 마찬가지다. 많은 훌륭한 작가들이 독창적인 방식으로 각자의 기량을 펼쳐도, 그 시대의 ‘대표 작가’와 ‘대표 사조’로 기억될 수 있는 건 손가락으로 꼽을 정도 뿐이다. 이런 맥락에서 한국 추상미술의 ‘승자’는 단색화, 그리고 대표 단색화가들이 시도했던 앵포르멜(즉흥적 비정형 회화)이었다. 그래서 점·선·면으로 화면을 구성하는 ‘기하학적 추상미술’(기하추상)은 중심부에서 밀렸다. 몬드리안과 칸딘스키 등에서 영향을 받은 이 사조는 1920년대부터 1970년대까지 한국 미술의 중요한 한 축이었다. 김환기·유영국·윤형근·박서보·하종현 등 주요 작가들이 거쳐가기도 했다. 어쩌면 기하추상이 한국 미술의 주요 사조가 될 수도 있었던 셈이다. 하지만 기하추상은 대중이 이해하기에 너무 어려웠다. “관객들과의 소통을 거부한다”는 비판이 잇따랐다. 새로운 대세로 떠오른 단색화와 민중미술도 기하추상을 비판했다. 한국적인 정신을 강조하는 단색화, 현실 참여를 강조하는 민중미술과 달리 기하추상이 서구적이고 장식적이라는 지적이었다. 그렇게 기하추상은 대중의 기억 저편으로 잊혀갔다. 이런 기하추상을 모처럼 재조명하는 전시가 열리고 있다. 국립현대미술관 과천관에서 열리고 있는 ‘한국의 기하학적 추상미술’이다. 한국 대표 추상미술가 47인의 작품 150여점과 각종 기록을 모았다. 전시를 본 일반 관객들은 물론 미술 관계자들 사이에서도 “그 옛날 한국 미술이 이렇게 세련됐다는 사실을 몰랐다”는 감탄이 나온다. 1929년 단성사가 영화 홍보를 위해 만든 ‘단성주보’ 300호의 표지에 등장하는 기하학적인 추상 이미지가 대표적이다.

    2023.11.22 08:19
  • 日 미술 차세대 스타의 나무머리 '트리맨', '스페이스K' 상륙

    일본은 현대미술 강국이다. 일단 ‘슈퍼스타 3인방’, 쿠사마 야요이(94), 나라 요시토모(64), 무라카미 다카시(61)부터 압도적인 존재감을 자랑한다. 세 작가 모두 뉴욕현대미술관(MoMA)을 비롯한 세계 유수의 미술관에서 작품을 만날 수 있고, 수십~수백억원에 달하는 가격에도 불구하고 이들의 작품을 사고야 말겠다는 컬렉터들이 전 세계에 넘쳐난다. 이들의 뒤를 잇는 작가군도 탄탄하다. ‘허리’에 해당하는 Mr.(미스터·54)와 이즈미 카토(54), 시오타 치하루(51) 등은 물론이고 젊은 작가들도 세계 미술계의 주목을 받으며 ‘차세대 슈퍼스타’ 자리를 노리고 있다. 젊은 작가인 유이치 히라코(41) 역시 다음 세대의 슈퍼스타 후보 중 하나다. 이제 막 40대에 들어섰지만 그의 대형 회화 작품은 세계 시장에서 수억원대를 호가한다. 특히 최근 들어 인기가 급상승하면서 한국에서 작품을 직접 보기는 더욱 어려워졌다. 히라코의 한국 팬들이 서울 마곡 스페이스K에서 16일부터 열리고 있는 개인전 ‘여행’을 반기는 이유다. 히라코의 트레이드 마크는 일명 ‘트리맨’이라 불리는 캐릭터다. 인간의 몸에 나무 머리, 사슴 뿔처럼 생긴 나뭇가지가 달려 있는 친근한 모양새다. 일본 민속 설화의 나무 정령을 참고해 만들어 일본적인 느낌도 물씬 풍긴다. 화풍은 일본 애니메이션과 동화를 연상시킨다. 그래서 히라코는 요시토모와 다카시 등 ‘일본 팝아트’의 계보를 잇는 작가로 꼽힌다. 전시장에서 만난 작가는 “어릴 때부터 미야자키 하야오의 ‘이웃집 토토로’ ‘원령공주’ 등 작품을 수백번씩 봤다”고 말했다. 이번 전시에 나온 작품은 총 30여점. 회화, 조각, 설치 등 다양한 장르의 대형 작품들이 여럿

    2023.11.21 09:16
  • 오로라, 파리지앵, 해바라기...팔순 老화가가 사랑한 풍경들

    전명자 작가(81)는 60여년 전 홍익대 서양화과에 들어간 이후 자신이 사랑하는 일상의 풍경을 줄곧 그려왔다. 아파트 실내와 창밖의 풍경, 아이들의 모습, 여행의 기록…. 흘러가는 세월만큼이나 그의 작품과 명성은 꾸준히 쌓여갔고, 마침내 서울여대 미술대학 교수가 됐다. 평온한 시간이 흘러가던 50대의 어느날. 그는 “다시 한 번 새로운 도전을 해보고 싶다”며 파리로 유학을 떠났다. 교수직을 던지고 가족도 한국에 둔 채. 그렇게 떠난 길에서 전 작가는 그간 보지 못했던 아름다운 풍경들을 만났다. 형언할 수 없을 정도로 신비로운 빛을 뿜어내는 북구의 오로라, 파리 거리의 낭만, 이글거리는 태양처럼 강렬한 이탈리아 토스카나의 해바라기 밭…. 그는 이 광경들을 합쳐 화폭에 담았다. 서울 인사동 선화랑에서 열리고 있는 개인전 ‘재현과 현전(現前)의 경계에서’는 그 결과물을 모아놓은 자리다. 전 화백의 별명은 ‘오로라 화가’다. “1995년 노르웨이와 아이슬란드 여행에서 오로라를 처음 본 이후 내 삶과 작품이 완전히 바뀌었다”고 입버릇처럼 말해서다. 그의 작품에서 두드러지는 몽환적인 초록색과 파란색도 오로라에서 모티브를 얻은 것이다. 하늘에 펼쳐지는 오로라와 함께 유럽의 성당, 악기를 연주하는 사람들, 길거리를 걷는 파리 시민 등 공존할 수 없는 요소들이 시공을 초월해 뒤섞여 있는 것도 전 작가 작품의 특징이다. 이렇게 그린 작품들은 다소 통속적이면서도 이해하기 쉽다. 전 작가는 “그림은 말로 설명할 필요 없이, 봤을때 그 자체로 아름다워야 한다고 생각한다”며 “관객들이 그림을 통해 내가 경험한 행복을 조금이라도 느낄 수 있기를 바란다”고 말했다. 80세를

    2023.11.21 08:54
  • 동화처럼 아름다웠던 파리 옛시절…한국서 추억하다

    좋은 음악은 처음 한 소절만으로도 듣는 이의 가슴을 뛰게 한다. 훌륭한 글도 마찬가지다. 작품의 배경지식과 작곡가(작가)의 의도를 예습한 다음에 만나면 금상첨화겠지만 그냥 즐기는 데는 아무래도 상관없다. 미술은 조금 다르다. 아무런 준비 없이 덜컥 만났다간 십중팔구 ‘시간 낭비’다. 대체 뭘 그린 건지, 어떤 의미가 담긴 건지 온전히 이해하려면 작가는 물론 시대·사조까지 미리 공부해야 하기 때문이다. “미술은 어렵다”는 사람이 많은 이유가 여기에 있다. 프랑스 화가 미셸 들라크루아(90)의 그림은 다르다. 좋은 음악의 첫 소절을 들을 때처럼 보는 이의 마음을 단숨에 사로잡는다. 그는 프랑스 파리의 풍경을 동화 같은 화풍으로 그린다. 색색의 불을 밝힌 상점들, 눈 오는 거리에서 마차를 타고 데이트를 즐기는 연인들, 아이와 함께 우산을 쓰고 걸어가는 어머니…. 화사한 색채와 정교한 붓질로 그가 그려낸 일상은 아기자기하면서도 따뜻하다. 무엇보다 쉽다. 이게 들라크루아를 ‘호불호 없는 화가’로 만들었고 전 세계에 수많은 팬을 거느리게 했다. ‘행복을 그리는 화가’ 들라크루아의 그림 200여 점이 다음달 16일 서울을 찾는다. 그의 90 평생을 통틀어 최대 규모 전시다. 장소는 서울 서초동 예술의전당 한가람디자인미술관이다. 전시를 주최하는 한국경제신문과 2448아트스페이스는 ‘미셸 들라크루아, 파리의 벨 에포크展’을 50% 저렴하게 만날 수 있는 ‘슈퍼 얼리버드’ 입장권을 20일부터 한정 판매한다. 가격은 1만원. 성인(2만원), 청소년(1만5000원), 어린이(1만2000원) 정상가보다 17~50% 저렴하다. 인터파크와 네이버 등에서 ‘들라크루아’로 검색한 뒤 예매하면 된다. 슈퍼

    2023.11.19 17:10
  • 과외 선생님과 사랑에 빠진 18살…11년간 총각 행세했다는데 [성수영의 그때 그 사람들]

    먼 나라에서 온 스물한 살의 피아노 과외 선생님을 처음 만난 날, 열여덟 살 청춘은 사랑에 빠졌습니다. 두 남녀는 머지않아 부모님의 눈을 피해 비밀 연애를 시작했습니다. 하지만 이듬해 선생님이 학생의 아이를 갖게 된 건 누구도 예상치 못한 일이었습니다. 완고하고 엄격한 데다 유달리 남의 눈을 의식하는 아버지는 절대 결혼을 허락하지 않을 게 뻔했습니다. 그렇다고 사랑의 도피를 하자니 먹고 살 길이 막막했습니다. 남자는 어머니에게 조언을 구했습니다. 어머니는 말했습니다. “아버지가 알면 가만히 있지 않을 테니까, 일단 엄마가 어떻게든 해 볼게. 그리고 상황을 좀 보자꾸나.” 그렇게 어머니는 아버지 몰래 예비 며느리와 손자가 살 집을 마련해 줬습니다. 손자는 며느리의 호적에 사생아로 올렸습니다. 남자는 만삭의 여자에게 눈물지으며 말했습니다. “내가 꼭 성공해서 빨리 독립할게. 그러면 우리, 멋진 결혼식을 올리자.” 1년, 2년, 3년…. 세월은 계속 흘렀습니다. 아이는 태어나 무럭무럭 자랐습니다. 하지만 여자와 아이가 사는 집을 찾는 남자의 발길은 점점 뜸해졌습니다. 일하느라 너무 바빠서, 갑자기 몸이 아파서, 급한 일이 생겨서…. 가지 못하는 이유가 늘어나는 만큼 이들의 사이는 점점 멀어졌습니다. 남자의 사랑이 식었기 때문만은 아니었습니다. 남자는 성공을 위해 안간힘을 쓰고 있었지만, 일은 좀처럼 잘 풀리지 않았습니다. 결국 두 사람은 11년 뒤 아버지가 세상을 떠나고 난 후에야 정식으로 결혼식을 올릴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사이 가족 사이는 돌이킬 수 없을 만큼 벌어져 있었습니다. 오늘은 그 남자, ‘근대미술의 선구자’로 불리는 에두아르 마네(1832~188

    2023.11.18 10:00
  • [이 아침의 화가] 화려하고 현란한 색채…MZ가 사랑한 박광수

    세대가 다르면 미감(美感)도 다르다. 예컨대 기성세대 컬렉터들은 어디에 걸어도 잘 어울리는, 차분하고 단정한 그림을 선호하는 경향이 뚜렷하다. 단색화가 대표적인 예다. 반면 요즘 젊은 세대에서는 서양 컬렉터처럼 화려하고 강렬한 그림을 좋아하는 이들이 많다. 박광수(39)가 지금 한국에서 가장 주목받는 30대 작가로 떠오른 배경이다. 서울과학기술대 조형예술과를 졸업한 그는 종근당 예술지상과 두산연강예술상 등을 받으며 일찌감치 작품성을 인정받았다. 지금은 참여하는 전시와 아트페어마다 작품을 ‘완판’시키며 MZ세대 컬렉터 사이에서 최고 인기 작가로 꼽힌다. 박 작가가 자연 속 인간을 소재로 그린 최근 작품에서는 현란한 색채와 거친 붓질이 두드러진다. 자칫 잘못 그리면 조잡하거나 혼란스러울 수 있지만, 치밀한 구성으로 커다란 캔버스에 역동적인 선과 색을 배치한 덕분에 ‘보는 재미가 있는 그림’이라는 평가를 받는다. 그림에 만화풍으로 그린 인간이 등장하는 것도 특징이다. 그는 “어린 시절 철원 숲속을 뛰어놀던 경험을 비롯해 동서양 미술사, 웹툰 등 다양한 요소를 녹였다”고 설명했다. 서울 삼청동 학고재갤러리에서 열리고 있는 개인전 ‘구리와 손’에서 그의 그림 30점을 만날 수 있다. 작품은 개막일 당일에 모두 팔렸지만, 관람은 12월 9일까지 무료로 가능하다. 성수영 기자 syoung@hankyung.com

    2023.11.14 18:20
  • 성공한 40대 '모태솔로남'...평생 '썸'만 타고 끝난 사연

    자기 일에서 큰 성취를 이룬 덕분에 부와 명성을 모두 누리는 40대 남성이 있었습니다. 그는 날카로운 지성의 소유자였습니다. 미술과 음악, 문학에 조예가 깊었고 문화생활을 즐겨서 “오페라 없는 삶은 견딜 수 없다”고 말하곤 했습니다. 유머 감각도 겸비했습니다. 냉소적인 성격 때문에 “사람 신경을 긁는 경향이 있다”는 평가도 받았지만, 치명적인 결점까지는 아니었습니다. 그의 인간적인 매력을 좋아하는 친구들도 많았으니까요. 외모도 나쁘지 않았습니다. 그가 입고 다니는 깔끔하고 세련된 옷은 사람들의 호감을 샀습니다. 누가 봐도 꽤 괜찮은 이 남자, 그런데 ‘모태 솔로’였습니다. “도대체 그 사람은 왜 연애를 안 한대?” 주변 사람들은 모일 때마다 이런 얘기를 화젯거리로 삼았습니다. 때로는 그에게 “왜 혼자 사느냐”고 직접 물어보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남자는 적당히 웃어넘길 뿐이었습니다. 사람들의 궁금증은 커져만 갔습니다. 그는 비밀이 많은 사람이었습니다. 그 뒤로 오랜 시간이 흘렀습니다. 남자가 평생 독신으로 살다 세상을 떠난 뒤에도 사람들은 여전히 그의 이야기를 궁금해했습니다. 이렇게 아름다운 작품들을 남긴 화가가 무슨 생각을 했는지, 무엇 때문에 한 번도 연애를 하지 않았는지, 누구를 사랑했는지를요. 오늘은 그 남자, 19세기 프랑스 화가 에드가 드가의 이야기를 풀어 보겠습니다. 드가, 인상주의를 만나다 드가는 1834년 프랑스 파리의 부잣집에서 5남매 중 장남으로 태어났습니다. 그의 아버지는 문화생활을 즐겼습니다. 루브르박물관은 가족이 즐겨 찾는 나들이 장소였지요. 어린 시절 박물관에서 본 그림들은 19살의 드가가 “화가가 되겠다”

    2023.11.11 09:57
  • 성공한 40대 '모태솔로남'...평생 '썸'만 타고 끝난 사연 [성수영의 그때 그 사람들]

    자기 일에서 큰 성취를 이룬 덕분에 부와 명성을 모두 누리는 40대 남성이 있었습니다. 그는 날카로운 지성의 소유자였습니다. 미술과 음악, 문학에 조예가 깊었고 문화생활을 즐겨서 “오페라 없는 삶은 견딜 수 없다”고 말하곤 했습니다. 유머 감각도 겸비했습니다. 냉소적인 성격 때문에 “사람 신경을 긁는 경향이 있다”는 평가도 받았지만, 치명적인 결점까지는 아니었습니다. 그의 인간적인 매력을 좋아하는 친구들도 많았으니까요. 외모도 나쁘지 않았습니다. 그가 입고 다니는 깔끔하고 세련된 옷은 사람들의 호감을 샀습니다. 누가 봐도 꽤 괜찮은 이 남자, 그런데 ‘모태 솔로’였습니다. “도대체 그 사람은 왜 연애를 안 한대?” 주변 사람들은 모일 때마다 이런 얘기를 화젯거리로 삼았습니다. 때로는 그에게 “왜 혼자 사느냐”고 직접 물어보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남자는 적당히 웃어넘길 뿐이었습니다. 사람들의 궁금증은 커져만 갔습니다. 그는 비밀이 많은 사람이었습니다. 그 뒤로 오랜 시간이 흘렀습니다. 남자가 평생 독신으로 살다 세상을 떠난 뒤에도 사람들은 여전히 그의 이야기를 궁금해했습니다. 이렇게 아름다운 작품들을 남긴 화가가 무슨 생각을 했는지, 무엇 때문에 한 번도 연애를 하지 않았는지, 누구를 사랑했는지를요. 오늘은 그 남자, 19세기 프랑스 화가 에드가 드가의 이야기를 풀어 보겠습니다. 드가, 인상주의를 만나다 드가는 1834년 프랑스 파리의 부잣집에서 5남매 중 장남으로 태어났습니다. 그의 아버지는 문화생활을 즐겼습니다. 루브르박물관은 가족이 즐겨 찾는 나들이 장소였지요. 어린 시절 박물관에서 본 그림들은 19살의 드가가 “화가가 되겠다”

    2023.11.11 09:04
  • 피카소·제프쿤스 작품, 한국에서 주인 만날 수 있을까

    파블로 피카소가 그린 여성 초상화(추정가 기준 30억원)와 ‘세계에서 가장 비싼 작가’ 제프 쿤스의 설치작품(16억~20억원)이 한국에서 새 주인을 찾는다. 서울옥션과 케이옥션이 각각 여는 11월 경매를 통해서다. 케이옥션은 오는 22일 서울 신사동 케이옥션 본사에서 경매를 연다. 총 91점, 약 91억원어치가 출품되는 이 경매에서 가장 눈에 띄는 건 제프 쿤스의 작품 'Encased-Five Rows'(16~20억원)이다. 흑인 노동자 계층 청소년의 꿈인 ‘Hoop Dream(농구 선수로 성공해서 사회적 명성과 부를 얻고자 하는 꿈)’을 주제로 한 작품이다. 제프 쿤스의 'Cow (Lilac): Easy Fun'(5~7억원)도 경매에 나왔다. 제프 쿤스의 두 작품은 예금보험공사가 위탁한 것으로, 파산한 재단의 자산을 현금화하기 위해 출품됐다. 케이옥션은 지난 7월 예금보험공사의 파산재단 미술품 매각주관사로 선정된 바 있다. 최근 작고한 박서보 화백의 연대별 작품 6점을 비롯해 이우환의 작품 5점, 장욱진의 '나무'(1억6000만~2억원) 등이 나왔다. 해외 작가 중에서는 아야코 록카쿠의 'Untitled'(4억~7억원), 로버트 인디애나의 'HOPE (Red/Yellow)'(1억6000만~3억5000만원) 등을 주목할 만하다. 경매에 나오는 작품들은 11일부터 경매 당일인 22일까지 케이옥션 본사 전시장에서 예약 없이 무료로 관람할 수 있다. 서울옥션은 오는 28일 서울 신사동 서울옥션 강남센터에서 11월 경매를 연다. 총 103점(125억원 규모)이 나왔다. 피카소의 작품 'Tete de Femme au Chignoni'는 특유의 입체주의 기법으로 그려낸 여성의 초상화로, 피카소의 초상화가 국내 경매에 출품된 건 이번이 처음이다. 작품이 낙찰되면 국내 경매 사상 피카소 작품 최고가 기록 경신이 확실시된다. 이전 기록은 2010년

    2023.11.10 10:55
  • "이걸로 소리를 낼 수 있다고?"…미술작품이 된 '난해한 악기들'

    “실험적이고 본격적이다.” 서울 소격동 아트선재센터에서 열리는 전시들은 이런 평가를 받을 때가 많다. 유명한 작가보다는 앞으로 유명해질 작가를, ‘잘 팔리는’ 작품보다는 예술성 높은 작품을 주로 소개하는 미술관의 성격 때문이다. 아트선재센터 1~2층에서 열리고 있는 레바논 출신 작가 타렉 아투이(43)의 국내 첫 개인전도 난해하게 느껴질 수 있는 전시다. 음악가와 작곡가로도 활동 중인 그는 프랑스 파리에 거주하며 ‘소리’를 주제로 한 설치미술 작품을 만든다. 파리 루이비통파운데이션(2015년)과 영국 테이트모던(2016년) 등에서 개인전을 열고 베네치아비엔날레(2019년)에 참여하는 등 해외에서는 이름난 작가지만 국내 관객에게는 아직 생소한 편이다. 올해 광주비엔날레에서 ‘큐레이터 추천 작가’로 선정됐는데도 그렇다. 미술과 음악을 넘나드는 특이한 작업 방식 때문이다. 작가는 “소리와 사람, 전통의 관계를 탐구하는 작품들”이라고 설명한다. 쉽게 풀어 말하면 사람들이 소리라는 수단을 통해 어떻게 의사소통하고 감정을 공유하는지, 옛날 사람들은 전통 악기를 어떻게 연주했는지, 이런 전통이 현대인의 삶과 생각에 어떤 영향을 끼치는지 작품을 통해 가늠해본다는 얘기다. 이번 전시에서 그는 한국 전통을 소재로 한 작품들을 선보인다. 꽹과리와 장구 등 한국 전통 악기, 청자와 한지 등 한국적인 기물들을 활용해 여러 소리를 만들었다. 북을 해체하고 북피(드럼헤드) 대신에 고무와 종이를 붙인 작품, 도자판을 긁어 소리를 내는 작품도 눈에 띈다. 3층에서는 김세중청년조각상을 받은 유망 조각가 정지현(37)의 개인전 ‘행도그’가 열리고 있다. 전시장을 가득 메운 건

    2023.11.09 18:57
  • 세상에 없는 악기, 미술 작품이 되다

    “실험적이고 다소 난해하다.” 서울 소격동 아트선재센터에서 열리는 전시들은 이런 평가를 받을 때가 많다. 이미 유명한 작가보다는 앞으로 유명해질 작가들을, ‘잘 팔리는’ 작품보다는 예술성 높은 작품들을 주로 소개하는 미술관의 성격 때문이다. 지금 아트선재센터 1~2층에서 열리고 있는 레바논 출신의 타렉 아투이(43)의 국내 첫 개인전도 난해하게 느껴질 수 있는 전시다. 음악가와 작곡가로도 활동 중인 그는 프랑스 파리에 거주하며 ‘소리’를 주제로 한 설치미술 작품을 만든다. 파리 루이비통 파운데이션(2015년)과 영국 테이트 모던(2016년) 등에서 개인전을 열고 베네치아비엔날레(2019년)에 참여하는 등 해외에서는 이름난 작가지만 국내 관객들에게는 아직 생소한 편이다. 올해 광주비엔날레에서 ‘큐레이터 추천 작가’로 선정됐는데도 그렇다. 미술과 음악을 넘나드는 특이한 작업 방식 때문이다. 작가는 “소리와 사람, 전통의 관계를 탐구하는 작품들”이라고 설명한다. 쉽게 풀어 설명하면 사람들이 소리라는 수단을 통해 어떻게 의사소통을 하고 감정을 공유하는지, 옛날 사람들은 전통 악기를 어떻게 연주했는지, 이런 전통이 현대인들의 삶과 생각에 어떤 영향을 끼치고 있는지를 작품을 통해 가늠해본다는 얘기다. 이번 전시에서 그는 한국의 전통을 소재로 한 작품들을 선보인다. 꽹과리와 장구 등 한국의 전통 악기, 청자와 한지 등 한국적인 기물들을 활용해 여러 소리를 만들었다. 북을 해체하고 북피(드럼헤드) 대신에 고무나 종이를 붙인 작품, 도자판을 긁어 소리를 내는 작품도 눈에 띈다. 3층에서 열리고 있는 전시도 직관적으로 이해가 어렵기는 마찬가지다. 알아볼 수 있

    2023.11.07 17:05
  • '빛의 화가'가 동판에 새긴 '명품 판화'의 세계

    명작을 ‘명품’으로 만드는 핵심 요소 중 하나는 희소성이다. 세상에 딱 하나밖에 없는 아름다움, 그 ‘원본의 아우라’를 내 것으로 만들기 위해 부자들은 지갑을 연다. 같은 거장의 그림이라도 판화가 유화보다 훨씬 싼 이유가 여기에 있다. 똑같은 작품이 여럿 있으니 작가가 직접 품질을 검수하든, 친필 사인을 넣든 판화 한 개당 가격은 결국 ‘원화값÷작품 수’에 수렴한다. 예외는 있다. 웬만한 대가의 회화만큼 후한 대접을 받는 판화도 있다. 한 장에 수천만원에서 수억원을 호가하는 17세기 네덜란드의 미술 거장 렘브란트 판레인(1606~1669)의 판화가 그렇다. ‘야경’ 등 빛의 효과를 절묘하게 표현한 유화로 유명한 렘브란트는 판화 분야에서도 ‘역대 최고’로 꼽히는 작가다. 동판을 긁어내 찍어낸 그림이라고는 믿기 어려울 정도로 섬세한 그의 작품들을 만나면, 왜 렘브란트의 이름 앞에 이런 수식어가 붙는지 알 수 있다. 사진처럼 사실적인 거장의 동판화렘브란트의 실력을 두 눈으로 확인하고 싶다면, 지금 대구행(行) 열차에 오르면 된다. 대구미술관에서 열리고 있는 판화전 ‘렘브란트, 17세기의 사진가’에 그의 동판화 120여 점이 전시돼 있기 때문이다. 지금까지 진품으로 확인된 렘브란트의 동판화가 300종류 안팎인 걸 감안하면 3분의 1가량이 대구에 모인 셈이다. 네덜란드 렘브란트순회재단과 벨기에 판화 전문 미술관 뮤지엄 드리드의 전폭적인 협조 덕분이라는 설명이다. 전시장 초입에 있는 ‘자화상’ 섹션에는 렘브란트가 거울에 비친 자신을 수없이 그리고 새기며 여러 표현과 기법을 연구한 흔적이 고스란히 녹아 있다. ‘거리의 사람들’ 섹션에선 눈먼 바이올린 연주자, 거

    2023.11.06 17:47
  • 유리로 빚어낸 아이슬란드 빙하

    경기 용인에 있는 호암미술관은 단연 가을에 가장 아름답다. 산중턱에 자리 잡은 덕분에 굽이굽이 들어가는 길부터 곱게 물든 단풍이 반긴다. 여기에 아름다운 호수와 호젓한 산책길이 더해지니 풍경화가 따로 없다. 미술관 2층에서 내다보는 풍경도 ‘작품’이다. 전통 정원인 미술관 부속 정원 ‘희원(熙園)’을 둘러보는 관람객은 그 풍경 속에 녹아드는 행운을 누릴 수 있다. 장 미셸 오토니엘과 루이스 부르주아의 조형 작품이 건네는 묘한 정취는 덤이다. 올해 호암미술관으로 늦가을 나들이를 해야 할 이유가 하나 더 있다. 가벼운 마음으로 쓱 둘러볼 만한 괜찮은 전시가 열리고 있어서다. 먼저 1층에 들어서면 아이슬란드 빙하의 풍경에서 영감을 얻은 로니 혼의 유리 작품 ‘열 개의 액체 사건’(2010·사진)이 관객들을 반긴다. 시간에 따라 달라지는 자연의 모습을 모티브로 한 작품이 아름다우면서도 신비롭다. 만지면 안 된다는 게 유일한 아쉬움이다. 같은 주제를 다룬 올라퍼 엘리아슨의 ‘도마다루 일광 연작(북쪽)’(2006)이 함께 벽에 걸려 있다. 2층에서 만날 수 있는 리크리트 티라바니자의 ‘무제2020(정물) 연작’(2023)은 남녀노소 누구나 좋아할 만한 참여형 미술 작품이다. 멸종 동물 20종의 이름과 모습을 알루미늄 판에 새겼다. 멸종 동물을 기억하자는 의미를 담은 작품이다. 관객들이 직접 탁본을 뜰 수 있도록 종이 등 관련 도구를 제공한다. 어린이도 충분히 할 수 있을 만큼 쉽고 재미있는데, 활짝 웃으며 탁본을 뜨는 관객 대부분은 성인이다. 이렇게 만든 탁본에 색칠할 수 있도록 작품 옆에는 책상과 색연필이 구비된 공간도 마련돼 있다. 빙하와 활화산 등 흙, 물, 불, 바람으로 이뤄

    2023.11.05 18:29
  • 아내가 친구와 바람을 피웠다…그래도 결혼은 계속됐다

    “친구, 여기 런던의 상황은 복잡해. 전시 때문에 일이 너무 많아. 내 처지가 어렵다는 걸 아내가 이해할 수 있도록 자네가 잘 설명해 줬으면 하네. 내 아내를 잘 돌봐주게.” 화가는 ‘베프’에게 이런 편지를 보냈습니다. 바다 건너 벨기에 브뤼셀에 남겨두고 온 아내가 외로움을 느끼지 않도록, 아내와 함께 시간을 보내며 그녀를 즐겁게 해달라고 부탁한 겁니다. 그만큼 화가는 아내를 사랑했습니다. 어린 시절의 동화 같은 만남, 전쟁으로 헤어진 후 운명적인 재회, 16년간의 결혼 생활…. 그 오랜 세월 동안 부부는 항상 서로의 버팀목이 돼 현실을 견뎌왔습니다. 그래서 더 충격이었습니다. 오랜만에 만난 아내가 꺼낸 첫마디가 “이혼하자”라니. 그것도 내가 편지를 보낸 그 친구 놈과 바람이 났다니…. 오늘은 이 기구한 운명의 화가, 르네 마그리트의 사랑과 예술 이야기를 풀어 보겠습니다. 이해할 수 없는 것들에 빠지다 마그리트는 1898년 벨기에의 작은 도시 레신에서 삼 형제 중 장남으로 태어났습니다. 이상적인 가정은 아니었습니다. 사업가인 아버지의 별명은 ‘허풍쟁이’. 말솜씨와 유머 감각이 뛰어났지만, 자기중심적이고 무책임한 데다가 방탕한 성격 때문에 붙은 별명이었습니다. 간혹 사업에 성공해 돈을 많이 벌기도 했지만 금세 돈을 다 날려버리곤 했습니다. 반면 어머니의 성격은 정반대였습니다. 성실하고 신중했지만 지나치게 섬세해서 우울증에 시달렸습니다. 마그리트가 열네 살이던 1912년, 어머니가 스스로 목숨을 끊은 것도 오랫동안 앓았던 우울증 때문이었습니다. 마그리트는 훗날 건조하게 회고했습니다. “1912년, 어머니는 더 이상 살고 싶지 않았다. 그녀는 강에 몸을 던

    2023.11.04 11:03
  • 아내가 친구와 바람을 피웠다…그래도 결혼은 계속됐다 [성수영의 그때 그 사람들]

    “친구, 여기 런던의 상황은 복잡해. 전시 때문에 일이 너무 많아. 내 처지가 어렵다는 걸 아내가 이해할 수 있도록 자네가 잘 설명해 줬으면 하네. 내 아내를 잘 돌봐주게.” 화가는 ‘베프’에게 이런 편지를 보냈습니다. 바다 건너 벨기에 브뤼셀에 남겨두고 온 아내가 외로움을 느끼지 않도록, 아내와 함께 시간을 보내며 그녀를 즐겁게 해달라고 부탁한 겁니다. 그만큼 화가는 아내를 사랑했습니다. 어린 시절의 동화 같은 만남, 전쟁으로 헤어진 후 운명적인 재회, 16년간의 결혼 생활…. 그 오랜 세월 동안 부부는 항상 서로의 버팀목이 돼 현실을 견뎌왔습니다. 그래서 더 충격이었습니다. 오랜만에 만난 아내가 꺼낸 첫마디가 “이혼하자”라니. 그것도 내가 편지를 보낸 그 친구 놈과 바람이 났다니…. 오늘은 이 기구한 운명의 화가, 르네 마그리트의 사랑과 예술 이야기를 풀어 보겠습니다. 이해할 수 없는 것들에 빠지다 마그리트는 1898년 벨기에의 작은 도시 레신에서 삼 형제 중 장남으로 태어났습니다. 이상적인 가정은 아니었습니다. 사업가인 아버지의 별명은 ‘허풍쟁이’. 말솜씨와 유머 감각이 뛰어났지만, 자기중심적이고 무책임한 데다가 방탕한 성격 때문에 붙은 별명이었습니다. 간혹 사업에 성공해 돈을 많이 벌기도 했지만 금세 돈을 다 날려버리곤 했습니다. 반면 어머니의 성격은 정반대였습니다. 성실하고 신중했지만 지나치게 섬세해서 우울증에 시달렸습니다. 마그리트가 열네 살이던 1912년, 어머니가 스스로 목숨을 끊은 것도 오랫동안 앓았던 우울증 때문이었습니다. 마그리트는 훗날 건조하게 회고했습니다. “1912년, 어머니는 더 이상 살고 싶지 않았다. 그녀는 강에 몸을 던

    2023.11.04 11:00
  • 호크니의, 호크니에 의한 빛의 방…86세 거장은 3년을 쏟아부었다

    “제가 그림을 그린 지 벌써 60년이 됐습니다. 나는 여전히 그림을 그립니다. 그렇습니다. 저는 아직도 이 일을 무척이나 즐기고 있습니다.” ‘우리 시대 최고의 미술 거장’으로 불리는 데이비드 호크니(86)의 목소리와 함께 가로 18.5m, 세로 26m, 높이 12m의 전시장 전체가 50분의 상영시간 내내 시시각각 모습을 바꾼다. 작품을 그리는 호크니의 손, 그에 따라 호크니의 그림 속에서 꽃을 피우듯 모습을 드러내는 식물들, 오케스트라 음악의 리듬에 맞춰 색을 바꾸는 휘황찬란한 조명…. ‘지금이 감동받을 시간’이라고 부채질하려는 제작 의도가 선명하게 느껴지지만, 호크니의 팬이라면 도저히 감동받지 않을 수가 없다. 그가 인생 말년의 3년을 쏟아 만든 작품 속에 들어와 있기 때문이다. 호크니가 제작한 몰입형 미디어아트 작품 ‘데이비드 호크니: 비거 앤드 클로저(Bigger & Closer)’가 지난 1일 서울 고덕동 ‘라이트룸 서울’에서 막을 올렸다. 이 작품은 평생 회화와 드로잉, 사진 콜라주, 아이패드 그림 등 새로운 형식을 끊임없이 시도해온 호크니의 또 다른 도전이다. 서울은 지난 2월 영국 런던에서 첫선을 보인 이 작품의 첫 해외 행선지. 여러모로 낯선 이 전시의 막전막후, 작품을 즐기는 방법을 리처드 슬래니 라이트룸 런던 최고경영자(CEO)에게 들어봤다.호크니가 직접 기획·내레이션 참여 이때까지 나왔던 몰입형 전시 대부분은 작고한 거장의 작품으로 만든 일종의 미디어아트였다. 이런 작품은 작가의 손이 닿지 않은 건 물론 승인조차 얻지 못했기 때문에 본질적으로 ‘팬아트’나 다름없다. 상당수 미술 평론가가 몰입형 전시를 “거장의 이름을 내걸고 만든 공허한 모조품”이라고 비판하

    2023.11.02 19:19
  • 단풍으로 충분한데 로니 혼 작품까지...올 가을 호암미술관에 갈 이유

    경기 용인에 있는 호암미술관이 가장 아름다운 계절은 단연 가을이다. 산중턱에 자리잡은 덕분에 굽이굽이 들어가는 길부터 곱게 물든 단풍이 반긴다. 여기에 아름다운 호수와 호젓한 산책길이 더해지니 풍경화가 따로 없다. 미술관 2층에서 내다보는 풍경도 ‘작품’이다. 전통정원인 미술관 부속 정원 ‘희원(熙園)’을 둘러보는 관람객은 그 풍경 속에 녹아드는 행운을 누릴 수 있다. 장 미셸 오토니엘과 루이스 부르주아의 조형 작품이 건네는 묘한 정취는 덤이다. 지금 호암미술관으로 가을 나들이를 해야 할 이유가 하나 더 있다. 가벼운 마음으로 쓱 둘러볼만한 괜찮은 전시가 열리고 있어서다. 먼저 1층에 들어서면 아이슬란드 빙하의 풍경에서 영감을 받은 로니 혼의 유리 작품 ‘열 개의 액체 사건’(2010)이 관객들을 반긴다. 시간에 따라 달라지는 자연의 모습을 모티브로 한 작품들이 아름다우면서도 신비롭다. 만지면 안 된다는 게 유일한 아쉬움이다. 같은 주제를 다룬 올라퍼 엘리아슨의 '도마다루 일광 연작(북쪽)'(2006)이 함께 벽에 걸려 있다. 2층에서 만날 수 있는 리크리트 티라바니자의 '무제2020(정물) 연작'(2023)은 남녀노소 누구나 좋아할 만한 참여형 미술 작품이다. 멸종 동물들을 기억하자는 의미에서 멸종 동물 20종의 이름과 모습을 알루미늄 판에 새겼다. 관객들이 직접 탁본을 뜰 수 있도록 종이 등 관련 도구를 제공하는 게 특징이다. 어린이들도 충분히 할 수 있을 만큼 쉽고 재미있는데, 활짝 웃으며 탁본을 뜨는 관객 대부분은 성인이다. 이렇게 만든 탁본에 색칠할 수 있도록 작품 옆에는 책상과 색연필이 구비된 공간도 마련돼 있다. 이 밖에도 빙하와 활화산 등 흙, 물, 불, 바

    2023.11.02 15: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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