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스크 칼럼] 금감원의 ELS 배상안 유감
한 달 전쯤 일이다. 금융부의 한 후배 기자가 어느 날 불쑥 회사로 들어왔다. 평소보다 진지한 표정을 지으며 기사 계획을 조곤조곤 보고했다. 요즘 ‘핫한’ 홍콩 H지수 주가연계증권(ELS) 관련 발제였다. 투자자에 대한 은행의 손실 배상안을 정부가 만드는 것에 대한 의견을 물은 설문조사 결과를 기사화하고 싶다고 했다. 서울대 연세대 고려대 등 서울 주요 대학 15곳의 경제학과 교수 296명을 대상으로 일일이 이메일을 보낸 뒤 받은 답이었다. 설문조사 결과는 선명했다. 정부가 일부 불완전 판매를 빌미로 투자자 책임과 자유시장 원칙을 훼손한다는 날 선 비판이 녹아 있었다.

당국의 자의적 잣대, 혼란만 키워

기자는 후배에게 물었다. (시키지도 않았는데) 왜 이처럼 복잡하고 손 많이 가는 일을 했는지. 후배 기자는 담담하게 말했다. “모든 이해 당사자에게 ‘경종(警鐘)’을 울리고 싶었습니다.”

순간 속내가 복잡해졌다. 후배 말대로 금융당국이 투자자 책임 원칙을 외면하고 국민정서법에 기대 홍콩 H지수 ELS 손실 배상안을 금융회사에 강요하는 현실을 꼬집고 싶은 마음은 굴뚝 같았다. 하지만 한편에선 대규모 손실을 본 후 배상을 손꼽아 기다리고 있는 투자자들의 비난을 견뎌낼 수 있을까 하는 걱정도 앞섰다. 우여곡절 끝에 경종을 울리긴 했다. 예상대로 해당 기사엔 수백 개의 ‘악플’이 주렁주렁 달렸다. 항의 전화도 이어졌다.

논란 끝에 금융감독원은 지난주 홍콩 H지수 ELS 분쟁조정기준(배상안)을 내놨다. 배상안을 훑어본 기자는 경악을 금치 못했다. 금감원이 정한 배상 비율(0~100%)이 너무 자의적이었기 때문이다. 불완전판매 여부뿐만 아니라 투자자의 나이, 상품 가입 액수, 투자 경험 등 법적 근거도 없는 고무줄 잣대로 배상액에 큰 차이를 두도록 했다.

예컨대 은퇴자와 가정주부, 고령자는 배상 비율에 5%포인트가 추가되고, 80세 이상 초고령자는 10%포인트가 가산되는 식이다. 가입액이 5000만원을 넘는 경우 실질적인 손실 위험을 인지했을 가능성이 높다는 이유로 배상 비율을 5~10%포인트 줄였다.

법과 원칙 따른 배상 이뤄져야

주식과 비트코인에 빗대 보면 이렇다. 삼성전자 주식을 샀다가 손해 본 사람 중 나이가 많은 투자자는 더 보전해주고, 비트코인을 많이 산 사람이 손실을 보면 덜 물어준다는 얘기다. 코미디가 따로 없다.

더 놀라운 건 금감원 스스로 자의적 판단임을 고백했다는 점이다. 금감원의 한 고위 임원은 배상안 발표 직후 브리핑을 통해 “배상 비율은 과학적인 비율이 아니고 정성적인 판단이 들어갔다”고 했다.

‘비과학적인’ 기준을 바탕으로 자율배상안을 마련해야 하는 은행들은 전전긍긍하고 있다. 자의적 판단 기준이 녹아든 자율배상 안건을 이사회에 올리면 배임 논란이 불거질 게 뻔해서다. 설사 자율배상안을 내놔도 문제다. 불만에 가득 찬 투자자들이 제기한 줄소송에 맞닥뜨릴 가능성이 크다.

금융당국은 지금이라도 국민정서법에서 벗어나야 한다. 근거 없는 잣대는 혼란만 부추길 뿐이다. 법(자본시장법과 민법)과 원칙(투자자 책임)에 따라 오롯이 불완전판매 여부를 따져 배상이 이뤄지는 게 맞다. 그때까지 경종은 그치지 않고 울릴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