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8일 미국 샌프란시스코에 있는 신약 개발사 길리어드사이언스 본사 입구에 들어서자 높이 3m가 넘는 붉은 리본이 가장 먼저 눈에 들어왔다. 에이즈(AIDS) 환자와 인간면역결핍바이러스(HIV) 감염자를 기리는 형상이다. 길리어드는 만성질환처럼 평생 약을 써야 하는 HIV를 완치시키는 약 개발에 승부를 걸었다. 본사 입구 동상은 그런 의지를 보여주는 상징물이다.HIV 치료제 시장 독보적 1위리본 형상 아래에는 길리어드가 지금까지 개발한 약들의 발자취가 필름 형태로 새겨져 있었다. 1996년 길리어드가 처음 선보인 망막염 치료제 ‘비스타이드’부터 가장 최신 약인 HIV 치료제 ‘선렌카’까지 한눈에 볼 수 있다. 1987년 설립된 길리어드는 HIV 치료제 시장에서 독보적인 글로벌 1위 기업이다. 시장점유율은 50%를 웃돈다. 혁신적인 신약을 내놓으며 시장을 주도해 온 결과다. 이 회사의 ‘빅타비’는 하루 알약 25개를 먹던 환자가 단 한 알만 복용할 수 있게 해준 약이다.제라드 베턴 길리어드 HIV임상개발 총괄 부사장(사진)은 “길리어드는 30년 넘게 HIV 치료제를 개발해 오고 있다”며 “현재는 HIV를 당뇨·고혈압 같은 만성질환처럼 관리하는 데 초점을 두고 있지만 아예 완치시킬 수 있는 약을 개발하는 것이 최종 목표”라고 했다.HIV 환자들에 새 삶 기회길리어드는 최근 미국 덴버에서 열린 바이러스학회에서 새로운 치료법에 대한 임상 결과를 공개했다. 1주일에 한 번 알약을 먹거나 1년에 두 번 맞는 주사로 기존의 매일 복용하던 약(빅타비)과 같은 효과를 얻었다. 몸속 바이러스가 거의 없다시피 유지돼 증상이 나타나지 않으며 외부로의 전염 가능성도 없었다. 길리어드는 여기서 그치지 않고 완치 약까지 개발하겠다는 계획이다.베턴 부사장은 “완치 약을 개발하고 있지만 HIV를 만성질환처럼 유지·관리하게 해주는 기존 약의 효능이 우수하고 안전해 기존 약의 안전성을 뛰어넘는 것이 당면한 과제”라고 말했다. 이어 “HIV를 천연두처럼 인류 역사에서 몰아낼 때까지 힘쓸 것”이라고 했다.신약 벤처의 ‘롤모델’길리어드는 신약 벤처기업의 대표적인 롤모델이다. 바이러스와 싸우는 ‘항바이러스제’ 한우물을 파서 글로벌 톱10 제약사 반열에 오른 드라마틱한 성장 이력 때문이다.길리어드는 설립 초기인 1980년대까지만 해도 ‘헛발질’의 연속이었다. 유전자치료제 개발에 도전했다가 투자금을 날리기도 했다. 반전의 시작은 독감약 타미플루였다. 2009년 신종플루가 세계적으로 유행하면서 ‘잭팟’을 터뜨렸다. 그해에만 31억5000만달러(약 4조1280억원)어치가 팔렸다.두 번째 히트작은 C형간염 치료제 ‘소발디’였다. 방치하면 간암으로 악화될 수 있는 C형간염 치료율은 50%에 그쳤다. 소발디는 치료율을 95%까지 끌어올렸다. C형간염 완치 시대를 연 셈이다. 출시 첫해인 2014년에만 100억달러 매출을 올리며 세계 시장 1위에 올랐다.길리어드는 항암제 시장으로도 사업 영역을 확장 중이다. 2017년 120억달러를 들여 카이트파마를 인수했다. 이 회사가 개발한 키메릭 항원수용체 T세포(CAR-T) 치료제 ‘예스카타’는 이 분야 글로벌 1위다. 유도미사일 항암제로 불리는 항체약물접합체(ADC) 유방암 치료제 ‘트로델비’도 주목받는다.길리어드는 연구개발(R&D)에 공격적인 투자 비중을 유지하고 있다. 지난해 매출 대비 R&D 투자 비율은 21.2%다. 매출 1위인 화이자(18.3%)보다 높은 수치다.샌프란시스코=이우상 기자 idol@hankyung.com
당뇨·비만 치료제 ‘위고비’ 개발사 노보노디스크가 표적 단백질 분해(TPD) 의약품 개발업체 네오모프와 2조원에 달하는 공동개발 및 라이센스 계약을 체결했다.네오모프는 지난 26일(현지시간) 노보노디스크와 분자접착제 기반 TPD 약물을 개발, 상용화하기로 협력했다고 발표했다. 네오모프는 2020년 설립돼 미국 캘리포니아에 본사를 둔 기업이다. 기존 약물로는 치료가 불가능했던 표적들 위주로 치료제를 연구한다. 아직까지는 전임상 단계 파이프라인을 보유하고 있다. 이번 계약에 따르면 네오모프가 특정 표적을 발견하고 임상을 주도할 예정이다. 노보노디스크는 화합물에 대한 추후 임상 및 상업화에 대한 권리를 독점적으로 갖게 된다. 전체 계약 규모는 14억6000만달러(약 1조9450억원)다.필 챔버레인 네오모프 최고경영자(CEO)는 “당뇨·비만 및 희귀 혈액질환 분야에서 세계적인 제약사로 꼽히는 노보노디스크와 협업하게 돼 기쁘다”며 “네오모프의 독자적인 분자접착제 플랫폼과 노보노디스크의 노하우가 결합되면, 암을 포함한 새로운 치료 분야로 확장해나갈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TPD란 질병의 원인이 되는 단백질을 분해하는 방식으로 치료하는 기술이다. 질환을 유발하는 단백질의 기능을 억제하는 차원이 아니라 아예 없애버리기 때문에 근본적인 치료가 가능하다는 장점이 있다. 분자접착제란 원래 상호작용하지 않던 단백질들이 서로 가까이 붙을 수 있게 만들어주는 약물이다. TPD 의약품을 만들 때 기반기술로 활용된다.노보노디스크뿐 아니라 화이자, 미국 머크(MSD), 로슈 등 다양한 글로벌 대형 제약사(빅파마)들이 TPD 분야에 뛰어들고 있다. 화이자는 TPD 기술을 활용한 항암제를 개발하기 위해 2021년 미국 바이오벤처와 2조원 규모의 공동연구 계약을 체결하기도 했다.국내에서는 SK바이오팜이 차세대 성장동력으로 TPD를 삼았다. 지난해 6월에는 620억원을 투자해 미국 TPD 전문 바이오기업 프로테오반트를 인수했다. 남정민 기자 peux@hankyung.com
금리 인상과 얼어붙은 투자 심리로 지난해 미국 바이오기업의 파산 신청(챕터11)이 2010년 이후 가장 많았던 것으로 조사됐다. 바이오업계 관계자는 "파산도 많아진 반면 우량 바이오회사를 중심으로 올해부터 투심이 조금씩 살아나고 있다"며 "시장에서 옥석가리기가 확실하게 이뤄지고 있는 과정"이라고 설명했다.S&P글로벌 마켓 인텔리전스에 따르면 2023년 미국 바이오기업 파산 신청은 18곳으로 전년(8곳)에 비해 두 배 이상 늘었다. 미국 의약전문지 피어스바이오텍 보도에 따르면 소렌토 테라퓨틱스가 업계 부호(billionaire)인 패트릭 순시옹 및 그의 면역치료 바이오기업 낸트셀과 법적 분쟁을 겪으며 파산을 신청했다. 소렌토는 미국 대형제약사 BMS의 아브락산과 경쟁할 복제약을 개발 중이었다. 이 역시 순시옹과 분쟁 대상이다.항암제 개발회사 인피니티 파마슈티컬즈의 경우 MEI 파마와의 합병 실패가 경영난의 도화선이 됐다. 지난해 7월 인력 75%를 감축한 데 이어 9월 파산을 신청했다. 이 회사는 요로상피암, 고형암 등 다양한 적응증에 효능을 보인 임상 중간단계 파이프라인(신약후보물질) '에가넬리시브'의 임상을 지속하기위해 기사 회생을 모색해왔다. MEI파마 역시 초반엔 인수합병에 관심을 보였지만, 주주의 반대에 부딪혀 무산됐다.지난해 6월 파산을 신청한 온코섹 메디칼은 파이프라인의 주요 임상에서 목표 응답률을 충족하지 못해 실패한 것이 위기로 이어졌다. 기존 치료제가 잘 듣지 않는 피부암(전이성 흑색종) 진행 환자들을 대상으로 머크의 키트루다와 함께 쓸 수 있는 파이프라인(인터루킨 12 인코딩 플라스미드)이었다. 이 회사는 200만달러의 대출금을 못갚은 후 파산을 신청했다.올들어 미국 바이오기업 휴머니젠과 애더시스도 파산신청을 했다. 단일클론항체 전문 개발기업인 휴머니젠은 지난해 여름 역합병 논의가 무산된 후 파산을 검토해왔다. 코로나19 입원 환자를 대상으로 한 치료후보물질(항 인간 GM-CSF 단일클론항체)도 성과를 내지 못했다. 이 회사의 파산신청은 처음이 아니다. 2015년에도 다른 회사 이름(칼로바이오스)으로 파산 신청을 한 후 재기한 경험이 있다. 이 회사는 또다시 유동성 위기에 봉착했고 파산신청 직전 제약·바이오사업을 대거 매각했다. 한때 세계 10대 유망 코로나치료제로도 꼽혔던 렌질루맙 등 주요 파이프라인을 2000만달러에 매각했다. 줄기세포 치료제 회사인 애더시스도 허혈성 뇌졸중 세포치료제에 대한 실망스러운 임상 3상 데이터가 나오자, 자산을 매각하고 파산을 신청했다.한편 구조조정 자문회사인 기빈스 어드바이저의 보고서에 따르면 2023년은 헬스케어 분야에서 최근 5년래 가장 많은 파산신청이 발생했다. 병원, 의료기관, 제약, 의료 장비 공급, 실험실 서비스, 노인 간호 등 분야에서 부채가 1000만달러를 초과하는 파산신청이 79건에 달했다. 이는 2022년에 비해 1.7배 이상, 2021년의 3배 이상 규모다. 파산 신청 중 상당 부분(28건)은 부채가 1억 달러 이상이었다. 분야별로는 노인 간호(15건)와 제약(20건)이 대부분이었고 가장 급증한 분야는 병원이었다. 병원 파산 신청은 2021년 3건, 2022년 2건에서 2023년 12건으로 급증했다. S&P는 "헬스케어 부문 파산 신청 건수가 전 업종 중 산업, 소비재 등에이어 3위를 기록하고 있다"며 "바이오기업의 파산 신청은 올들어 다소 줄었지만 여전히 높은 이자율과 어려운 노동 시장에 직면하고 있다"고 분석했다. 기빈스는 "헬스케어 파산 신청이 지난해 4분기까지 6분기 연속 증가했다"며 "올해에도 작년과 비슷한 파산 증가세를 보일 것"으로 예측했다.안대규 기자 powerzanic@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