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구려 침공' 참패의 당태종은 생전에 복수를 하지 못했다
-
기사 스크랩
-
공유
-
댓글
-
클린뷰
-
프린트
누군가 싸움을 걸어온다면 안시성처럼 침착하게
[arte] 강희찬의 역사영화-진실과 거짓
[arte] 강희찬의 역사영화-진실과 거짓
중국인들에게 역사에서 가장 자랑스러운 왕조를 말해보라 하면 당(唐)을 꼽는 사람들이 많다.
당은 문화가 번성했고 동서양을 잇는 실크로드에서 보듯 국제적이었다. 황제 중에는 당태종을 인물로 꼽을 수 있다.
무인형 황제였던 태종은 수당 전환기의 혼란을 수습하고 국토를 재통일하고 주변국을 안정화시켰다.
호걸형 인물이라고 할 수 있는데 그런 그가 수년간 치밀하게 준비해서 시작한 것이 고구려 침공이었다.
당나라 수도 시안에서 고구려까지는 수개월의 거리. 신하들은 고구려는 수성전술에 강한 나라이니 원정은 힘들다고 반대했지만, 당태종은 지형 등 군사시설 정보에 익숙한 자를 고구려에 보낼 정도로 꼼꼼히 원정 준비를 하기 시작했다.
전쟁을 일으킬 명분만을 기다리고 있는데 연개소문이 당나라에서 보낸 사신을 토굴에 가두어 버렸다.
전운이 감돌았다.
중국의 영웅 당태종은 연개소문이 고구려의 왕을 죽이고 군권을 장악했다는 것을 명분 삼아 645년에 고구려 친정에 나섰다. 그는 자신만만하게 배 5백 척의 수병 5만 명, 25만 명의 육군을 이끌고 고구려로 향했다.
초기에는 성 몇 개를 쉽게 굴복시켰다.
문제는 안시성이었다.
안시성은 자연조건을 이용한 천연의 요새요, 명장 양만춘(이 이름은 나중에 붙여진 것으로 역사서에는 안시성 성주라고만 나온다.)이 지키고 있으니 ‘공격하지 않아야 할 성’이라고 우회하려 했으나 이곳을 건너뛰었을 때 후방이 위태로울 수 있기에 결국 함락시키기로 결정한다. 안시성 전투에 대한 기록은 우리 역사서에는 남아 있지 않아 적국인 중국의 일방적 기록에만 의지해야 하는 상황이다.
그리고 당태종은 역사를 자신에게 유리하게 입맛대로 바꾸어버린 것으로 지금도 비판받는 인물이다.
상황이 이러하기에 당시의 전황을 밝혀내기는 어렵고 다만 정황으로 상황을 추측해 볼 뿐이다.
성은 견고했고 안시성 안의 5만 명 넘는 군민들은 불굴의 정신을 보여줬다.
원정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보급로의 확보이기에 당나라 수군은 안시성 배후에서 공격하면서 보급로를 확보하려 했으나 사전에 고구려 수군에게 격퇴당하고 만다.
또 초기에 함락시켰다고 믿었던 고구려의 성들도 향후 보급로가 차단될 걸 보면 다시 고구려 군에게 빼앗겼던 것 같다.
요컨대, 고구려는 국가의 명운을 걸고 당의 침입에 대비해 철저한 전략을 세웠고 그에 맞춰 혼신의 힘을 다해 전쟁을 수행했다. 겨울이 다가오고 있었고 보급은 끊겼다. 당태종은 치욕스러운 퇴각을 결정한다.
중국에 맞서는 고구려의 전략은 정교했고 완벽히 정신이 무장된 백성들은 모두 작은 영웅들이었다.
당군은 좋은 길을 놔두고 진흙뻘이 펼쳐진 벌판을 건너 도망간다. 황제 자신이 진흙밭에서 내려 수레를 밀었다고 하니 당시 상황을 상상해볼 수 있다.
이때 극적인 스토리텔링이 당태종이 눈에 화살을 맞아 부상을 입었다는 것이다. 중국 역사서에는 퇴각 하는 길에 종기가 걸렸다고만 나온다. 피로와 위생, 그리고 폭설 등 여러 요인이 겹쳤으니 가능한 이야기이다.
고구려 원정의 여파로 병에 걸린 당태종은 4년 뒤에 죽었다.
‘고구려를 치는 것을 그만두라.’는 유언을 남겼다고 한다.
20년 가까운 세월이 흘러 당은 668년에 결국 고구려를 멸망시켰다. 아버지를 이어 황제자리에 있던 당고종은 안시성을 불태우고 주민을 죽이고 성을 폐쇄하는 것으로 분을 풀었다.
그러나 고구려의 정신은 발해로, 그리고 고려로 이어져 살아남았다.
당은 문화가 번성했고 동서양을 잇는 실크로드에서 보듯 국제적이었다. 황제 중에는 당태종을 인물로 꼽을 수 있다.
무인형 황제였던 태종은 수당 전환기의 혼란을 수습하고 국토를 재통일하고 주변국을 안정화시켰다.
호걸형 인물이라고 할 수 있는데 그런 그가 수년간 치밀하게 준비해서 시작한 것이 고구려 침공이었다.
당나라 수도 시안에서 고구려까지는 수개월의 거리. 신하들은 고구려는 수성전술에 강한 나라이니 원정은 힘들다고 반대했지만, 당태종은 지형 등 군사시설 정보에 익숙한 자를 고구려에 보낼 정도로 꼼꼼히 원정 준비를 하기 시작했다.
전쟁을 일으킬 명분만을 기다리고 있는데 연개소문이 당나라에서 보낸 사신을 토굴에 가두어 버렸다.
전운이 감돌았다.
중국의 영웅 당태종은 연개소문이 고구려의 왕을 죽이고 군권을 장악했다는 것을 명분 삼아 645년에 고구려 친정에 나섰다. 그는 자신만만하게 배 5백 척의 수병 5만 명, 25만 명의 육군을 이끌고 고구려로 향했다.
초기에는 성 몇 개를 쉽게 굴복시켰다.
문제는 안시성이었다.
안시성은 자연조건을 이용한 천연의 요새요, 명장 양만춘(이 이름은 나중에 붙여진 것으로 역사서에는 안시성 성주라고만 나온다.)이 지키고 있으니 ‘공격하지 않아야 할 성’이라고 우회하려 했으나 이곳을 건너뛰었을 때 후방이 위태로울 수 있기에 결국 함락시키기로 결정한다. 안시성 전투에 대한 기록은 우리 역사서에는 남아 있지 않아 적국인 중국의 일방적 기록에만 의지해야 하는 상황이다.
그리고 당태종은 역사를 자신에게 유리하게 입맛대로 바꾸어버린 것으로 지금도 비판받는 인물이다.
상황이 이러하기에 당시의 전황을 밝혀내기는 어렵고 다만 정황으로 상황을 추측해 볼 뿐이다.
성은 견고했고 안시성 안의 5만 명 넘는 군민들은 불굴의 정신을 보여줬다.
원정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보급로의 확보이기에 당나라 수군은 안시성 배후에서 공격하면서 보급로를 확보하려 했으나 사전에 고구려 수군에게 격퇴당하고 만다.
또 초기에 함락시켰다고 믿었던 고구려의 성들도 향후 보급로가 차단될 걸 보면 다시 고구려 군에게 빼앗겼던 것 같다.
요컨대, 고구려는 국가의 명운을 걸고 당의 침입에 대비해 철저한 전략을 세웠고 그에 맞춰 혼신의 힘을 다해 전쟁을 수행했다. 겨울이 다가오고 있었고 보급은 끊겼다. 당태종은 치욕스러운 퇴각을 결정한다.
중국에 맞서는 고구려의 전략은 정교했고 완벽히 정신이 무장된 백성들은 모두 작은 영웅들이었다.
당군은 좋은 길을 놔두고 진흙뻘이 펼쳐진 벌판을 건너 도망간다. 황제 자신이 진흙밭에서 내려 수레를 밀었다고 하니 당시 상황을 상상해볼 수 있다.
이때 극적인 스토리텔링이 당태종이 눈에 화살을 맞아 부상을 입었다는 것이다. 중국 역사서에는 퇴각 하는 길에 종기가 걸렸다고만 나온다. 피로와 위생, 그리고 폭설 등 여러 요인이 겹쳤으니 가능한 이야기이다.
고구려 원정의 여파로 병에 걸린 당태종은 4년 뒤에 죽었다.
‘고구려를 치는 것을 그만두라.’는 유언을 남겼다고 한다.
20년 가까운 세월이 흘러 당은 668년에 결국 고구려를 멸망시켰다. 아버지를 이어 황제자리에 있던 당고종은 안시성을 불태우고 주민을 죽이고 성을 폐쇄하는 것으로 분을 풀었다.
그러나 고구려의 정신은 발해로, 그리고 고려로 이어져 살아남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