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패스트 라이브즈' 스틸 이미지 /CJ ENM 제공
'패스트 라이브즈' 스틸 이미지 /CJ ENM 제공
"'인연'이란 단어는 한국에선 누구나 아는 말이지만, 다른 나라 사람들은 그 의미를 잘 몰라요. 영화 '패스트 라이브즈'를 통해 한국적 정서인 인연을 전 세계 사람들이 이해하고 느끼는 걸 보면서 행복했습니다."

장편 데뷔작 '패스트 라이브즈'로 미국 최고 권위의 아카데미 시상식 후보에 오른 셀린 송(36) 감독이 그의 작품 속 키워드 '인연'에 대해 이같이 말했다. 6일 한국 언론들과 화상으로 만난 자리에서 송 감독은 "저의 어린 시절 인연을 돌아보며 만든 작품이기 때문에 한국의 공간과 언어뿐 아니라, 한국의 철학까지 녹아든 작품이 태어났다"고 했다.

한국계 캐나다인인 송 감독의 자전적 이야기를 담은 '패스트 라이브즈'는 지난달 23일(현지 시각) 미국 아카데미 시상식 작품상과 각본상 후보에 올랐다. 한국계 여성 감독이 작품상 후보로 거론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한국계 감독 영화로는 2020년 봉준호의 '기생충', 2021년 한국계 미국인 정이삭의 '미나리' 이후 세 번째다.

"'기생충'을 계기로 해외 관객들이 한국어 자막이나 문화적 요소를 거부감 없이 받아들이게 된 덕을 본 것 같아요. K팝, K드라마의 인기는 말할 것도 없고요. 하하."

여성 감독의 데뷔작이 아카데미 시상식의 문을 두드린 것은 이례적이다. 그동안 랜다 헤인즈의 '작은 신의 아이들'(1986), 그레타 워윅의 '레이디 버드'(2017) 등이 작품상 후보에 올랐으나 수상과는 인연이 없었다. 송 감독은 다음 달 10일(현지 시각) 열리는 시상식에서 '플라워 킬링 문'의 마틴 스코세이지, '오펜하이머'의 크리스토퍼 놀런 등 할리우드를 대표하는 감독들과 최종 수상을 놓고 경쟁한다.
데뷔작 '패스트 라이브즈'로 제96회 아카데미 시상식 작품상과 각본상 후보에 오른 셀린 송 감독. (C) Matthew Dunivan (2024) /CJ ENM 제공
데뷔작 '패스트 라이브즈'로 제96회 아카데미 시상식 작품상과 각본상 후보에 오른 셀린 송 감독. (C) Matthew Dunivan (2024) /CJ ENM 제공
셀린 송 감독은 '넘버 3'(1997) 등을 연출한 송능한 감독의 딸이다. 12세에 부모를 따라 캐나다로 이민 간 뒤 미국 뉴욕에서 극작가로 활동했다. 한국 만재도 해녀들의 이야기와 이민 1.5세대라는 정체성에 대한 고민을 담은 연극 '엔들링스'를 선보이기도 했다. 감독은 "24년 전, 12년 전을 거슬러 올라가는 '인연 이야기'를 시각적으로 연출하기 위해 연극이 아닌 영화 시나리오에 도전했다"고 했다.

다음 달 6일 국내 개봉하는 '패스트 라이브즈'는 한국을 떠나 살아온 감독의 경험을 반영한 작품이다. 서울에서 어린 시절을 보낸 첫사랑 '나영'(그레타 리 분)과 '해성'(유태오 분)이 24년 만에 뉴욕에서 재회한 이틀간의 시간을 그렸다. 감독처럼 아버지를 따라 캐나다로 이민 간 나영은 이미 미국인 남성과 결혼한 상태다.

영화는 나영과 해성, 그리고 나영의 남편 '아서'가 함께 술을 마시는 장면에서 출발한다. 실제로 감독과 현재 남편, 그리고 첫사랑이 뉴욕에서 겪은 실화에 기반했다. "두 사람은 말이 안 통하니까, 제가 중간에서 통역을 해줬어요. 마치 바로 그 순간에 제 과거와 현재, 미래가 같이 있는 것 같았습니다. 주변 친구들한테 이런 이야기를 하니까 그들도 그런 느낌을 받은 적이 있다고 하더라고요. 모두가 한 번쯤은 느껴봤을 법한 이야기를 쓸 수 있겠다고 생각했습니다."
'패스트 라이브즈' 스틸 이미지 /CJ ENM 제공
'패스트 라이브즈' 스틸 이미지 /CJ ENM 제공
특별한 것 없어 보이는 첫사랑 서사지만, 감독은 이 이야기를 인연이라는 키워드로 엮어냈다. '전생'과 '회자정리' 등 불교 철학을 통해 두 인물의 끊어질 듯 이어진 관계를 절절하게 풀어내면서다. 감독은 "우리는 모두 언제나 어딘가에 두고 온 삶이 있다"며 "우리 인생은 여러 가지 시간을 지니고 있고, 평범한 사람들에게도 특별한 순간들이 있다는 걸 보여주고 싶다"고 했다.

"인연이란 단어는 한국에만 있지만, 그 느낌은 전 세계 어떤 사람이라도 알 수 있는 것 같아요. 영화 내 인연에 관해 얘기하는 장면이 나오는데, 여기서 관객은 인연이라는 개념에 대한 힌트를 얻을 수 있죠. 영화를 본 어떤 관객도 인연을 이해 못하는 경우는 없더라고요."

안시욱 기자 siook95@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