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왼쪽부터)피아니스트 임윤찬과 예브게니 키신. 뮌헨 필하모닉·Steve J. Sherman 제공
(왼쪽부터)피아니스트 임윤찬과 예브게니 키신. 뮌헨 필하모닉·Steve J. Sherman 제공
음악가들이 준비된 연주를 모두 마치고 객석을 향해 고개를 숙이면 어김없이 터져 나오는 단어가 있다. ‘다시 한번’을 뜻하는 프랑스어 “앙코르”다.

17세기 이탈리아에서 처음 시작된 것으로 알려진 앙코르는 요리로 따지면 디저트와 같다. 청중의 환호에 보답하는 차원에서 추가로 들려주는 연주인 만큼 앙코르 형식은 제각각이다. 통상 앙코르는 2~3곡이 적당하다는 의견이 많지만, 정답은 없다. 본 프로그램의 특성을 고려해 앙코르를 생략하기도 하고, 연주자 성향에 따라 1시간 넘게 앙코르를 들려주기도 한다.

지메르만은 ‘앙코르의 정석’…작품 특성 따라 아예 안 하기도

‘살아있는 전설’로 불리는 폴란드 출신의 명피아니스트 크리스티안 지메르만은 지난 27일 부산문화회관 대극장에서 연 내한 리사이틀에서 앙코르의 정석을 보여줬다. 이날 그는 연주 사이사이 잔기침을 하는 등 컨디션 난조를 짐작게 했는데, 지친 표정을 지으면서도 청중을 향한 특별 선물은 빼먹지 않았다.

청중의 열렬한 환호에 어쩔 수 없단 듯 다시 무대에 등장한 지메르만은 앙코르로 라흐마니노프 프렐류드 등 2곡을 들려줬다. 마지막 곡을 치고선 더 이상의 연주는 기대하지 말라는 듯 피아노 건반 덮개를 완전히 닫아버리는 그의 제스처에 객석 곳곳에선 웃음이 터져 나오기도 했다. 세계서 가장 까칠하다고 소문난 거장이 보여준 재치였다.
폴란드 출신의 명피아니스트 크리스티안 지메르만. (c)Bartek Barczyk
폴란드 출신의 명피아니스트 크리스티안 지메르만. (c)Bartek Barczyk
그런가 하면 뉴욕타임스(NYT)가 ‘아이슬란드의 글렌 굴드’라고 극찬한 피아니스트 비킹쿠르 올라프손은 지난 15일 서울 예술의전당에서 연 공연에서 앙코르로 단 한 곡도 연주하지 않았다. 수미상관을 이루는 주제 선율 아리아와 이를 변주한 30개의 짧은 곡이 치밀하게 얽혀 있어 중간 휴식도 하지 않는 바흐의 걸작 ‘골드베르크 변주곡’을 본 프로그램으로 연주한 만큼 관객들이 받은 감동을 앙코르가 오히려 깰 수 있다는 이유에서다.

그는 여러 차례 인사에도 박수 세례가 끊이지 않자 직접 무대에 나와 사정을 설명하기도 했다. “바흐 ‘골드베르크 변주곡’의 유일한 문제는 앙코르를 할 수 없다는 겁니다. 바흐는 아리아를 중심으로 도는 30개 행성의 태양계를 창조했어요. 그 위대한 세계에 제 마음대로 31번째 행성을 더할 순 없습니다.”라고.
피아니스트 비킹구르 올라프손이 지난 15일 서울 예술의전당 콘서트홀에서 연주하고 있다. 마스트미디어 제공
피아니스트 비킹구르 올라프손이 지난 15일 서울 예술의전당 콘서트홀에서 연주하고 있다. 마스트미디어 제공
올라프손만 그랬던 건 아니다. 피아니스트 임윤찬은 평소 2곡 안팎의 앙코르를 들려주지만, 2021년 10월 리스트 ‘초절기교 연습곡’ 전곡(12곡)을 무대에 올릴 때는 앙코르를 생략했다. 그는 “앙코르 선정에 많은 고민이 있었지만, 인생의 탄생과 죽음이 전부 담겨 있는 이 연습곡 뒤에 더 연주할 수 있는 작품은 없다는 결론에 도달했다”며 “(때문에) 앙코르를 연주하지 않았다”고 했다.

오케스트라가 주도하는 교향곡 중에도 앙코르와 궁합이 맞지 않는 작품들이 있다. 차이콥스키 교향곡 6번 ‘비창’, 말러 교향곡 6번 ‘비극적’, 베토벤 교향곡 9번 ‘합창’. 말러 교향곡 2번 ‘부활’이 대표적이다. 하나 같이 작곡가가 그린 슬픔에 빠져들어 그 여음까지 느끼는 게 포인트인 곡들이거나 엄청난 에너지의 뒷맛을 곱씹어야 참맛을 느낄 수 있는 작품들이다.

구스타보 두다멜이 지휘한 LA 필하모닉은 2015년 내한 당시 말러 교향곡 6번을 연주한 뒤 앙코르를 생략했고, 이달 베토벤 교향곡 9번 '합창'을 각각 무대에 올린 서울시립교향악단과 KBS교향악단도 앙코르 없이 무대를 떠났다.

앙코르로 ‘공연의 3부’ 만든다…키신·유자 왕·조성진은 ‘넉넉히’

피아니스트 조성진이 지난 7월 4일 서울 예술의전당 콘서트홀에서 연주하고 있다. 크레디아 제공
피아니스트 조성진이 지난 7월 4일 서울 예술의전당 콘서트홀에서 연주하고 있다. 크레디아 제공
반면 작품 성격을 크게 따지지 않고 앙코르를 넉넉하게 베푸는 연주자들도 많다. ‘피아노의 황제’로 통하는 러시아 피아니스트 예브게니 키신은 2006년 첫 내한 리사이틀 무대에서 10곡을 앙코르로 선물했다. 청중들은 떠날 생각이 없는 듯 연신 박수 세례를 퍼부으며 그를 무대로 불러냈고, 앙코르는 1시간 넘게 이어졌다. "키신은 앙코르로 3부 공연을 한다"는 얘기는 괜한 말이 아니었다. 중국이 낳은 세계적인 피아니스트 유자 왕도 지난해 내한 리사이틀에서 무려 18곡을 앙코르로 쏟아내 클래식 애호가들을 열광케 했다.

피아니스트 조성진도 앙코르에 '진심'인 연주자다. 조성진은 2018년 국내 리사이틀에서 연주 시간만 40분에 달하는 쇼팽 발라드 전곡(4곡)을 앙코르로 들려주면서 청중의 열광적인 환호를 얻었다. 2020년 리사이틀에선 앙코르로 약 30분이 소요되는 리스트의 피아노 소나타 b단조 전 악장(오후 3시 공연)과 40분짜리 대곡인 무소르그스키의 '전람회의 그림'(오후 7시 공연)을 선보였다.

앙코르에 후한 연주자로는 피아니스트 선우예권과 손열음도 있다. 선우예권은 미국 밴 클라이번 콩쿠르에서 우승한 해(2017년) 연 리사이틀에서 7곡을 추가로 연주했고, 손열음은 2016년 공연에서 앙코르로 총 10곡을 들려준 바 있다.

김수현 기자 ksoohyun@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