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년 루체른 페스티벌에서 사이먼 래틀(오른쪽), 던킨 와드(왼쪽)와 한 무대에 오른 최재혁.
2018년 루체른 페스티벌에서 사이먼 래틀(오른쪽), 던킨 와드(왼쪽)와 한 무대에 오른 최재혁.
전 세계 ‘미쉐린 셰프’들이 한자리에 모인다고 가정해보자. 그들을 지켜보며 요리의 노하우를 전수받을 기회가 있다면? 초년병 요리사에게는 최고의 자리가 아닐 수 없다.

클래식 음악계에도 그런 자리가 있다. 1994년부터 매년 여름 스위스 알프스의 산중턱에서 열리는 ‘베르비에 페스티벌’ 이야기다. 지난달 14~30일 열린 이 페스티벌의 모토는 대가들의 지혜와 경험을 젊은 음악가들과 나누는 것이다. 미래의 거장들이 이 축제를 기다리는 이유다. 오디션을 통해 세계 각지의 젊은 단원으로 오케스트라를 구성하고, 페스티벌 기간 내내 거장들과 함께 음악을 만든다. ‘컨덕팅 펠로십’ 프로그램도 그 일환이다. 35세 이하의 젊은 지휘자 중 3~5명을 선발해 내로라하는 마에스트로 곁에서 지휘를 보조하는 프로그램이다. 이번 축제에서 한국인 중 유일하게 컨덕팅 펠로십에 선정된 지휘자는 최재혁(29). 300~400명의 경쟁자를 제치고 선발된 그는 주빈 메타, 다니엘레 가티, 플라시도 도밍고, 클라우스 메켈레, 라하브 샤니, 크리스토프 에센바흐 등 말 그대로 현존하는 세계 최고의 지휘자들을 도왔다.

주빈 메타의 기본기, 다니엘레 가티의 진심을 배웠다

최씨는 8년차 지휘자다. 작곡가로도 실력을 인정받았다. 20대 초반이던 2015년 유럽의 그라네페크 페스티벌에서 지휘자로 데뷔 무대를 가졌고, 3년 뒤 스위스 루체른 페스티벌에서 사이먼 래틀과 함께 런던 심포니 오케스트라를 이끌며 본격적인 지휘 활동을 시작했다. 지휘자 3인이 동시 무대에 오르는 슈톡하우젠의 ‘그루펜’을 연주한 것.

그는 초등학교 때 뉴질랜드 유스 오케스트라에서 활동하며 마에스트로를 꿈꾸게 됐다. 첫 리허설 때 오케스트라의 거대한 에너지, 그걸 빚어낸 작곡가와 지휘자에게 흠뻑 빠졌다고 했다. 이후 미국 월넛힐예술고와 줄리아드 음대에서 작곡을 배웠다. 학교에선 작곡을 전공하고, 지휘는 교실 밖에서 배웠다.

이번 페스티벌에서 그는 2주에 걸쳐 거장들의 노하우를 빠르게 흡수했다. “베르디 레퀴엠을 지휘하는 가티의 카리스마는 리허설 때마다 실전을 방불케 했어요. 지휘자의 카리스마는 음악을 대하는 진심과 모든 것을 쏟아붓는 모습에서 나온다는 것을 실감했죠.”

가티는 ‘세계 3대 오케스트라’로 꼽히는 로열콘세르트헤바우 오케스트라(RCO)에 이어 내년부터 독일 대표 명문 악단 드레스덴 슈타츠카펠레를 이끄는 세계적인 지휘자다. “가티는 음표와 리듬 그리고 화성 뒤에 숨어있는 작곡가의 의도를 함께 찾아야 한다고 생각하는 지휘자였죠. 메타는 기본기를 강조했고, 도밍고는 화성과 색채를 중요하게 여겼습니다. 메켈레와 에센바흐를 보면서 ‘지휘자에 따라 오케스트라의 소리가 완전히 달라지는구나’란 걸 다시 한번 느꼈습니다.”

“작곡가가 셰프라면, 지휘자는 웨이터”

최재혁은 작곡가로도 출중한 실력을 갖췄다. 2017년 제네바 국제 콩쿠르 작곡 부문에서 역대 최연소(당시 23세)로 우승을 거머쥐었다. 제네바 콩쿠르는 작곡 분야에서 세계 최고 권위의 콩쿠르로 꼽힌다. 2015년부터 앙상블블랭크를 창단해 음악감독으로도 활약하고 있다. “작곡과 지휘는 완전히 다르죠. 하지만 둘을 섞으면 장점이 생깁니다. 지휘자의 시선으로 작곡하면 실제 연주 상황을 반영할 수 있죠. 반대로 작곡가 입장에서 지휘하면 곡을 조금 더 깊이 이해하게 됩니다.”

클래식 음악계에는 “지휘자는 모든 음악가 중 가장 늦게 꽃 핀다”는 말이 있다. 악기가 아니라 악기 연주자를 이끌려면 충분한 연륜과 카리스마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20대인 최재혁이 앞으로 채워가야 할 일이다. 최재혁은 지휘자의 가장 중요한 덕목으로 ‘작곡가를 대변하는 것’을 꼽았다. “작곡가가 셰프라면 지휘자는 그 음식을 식지 않게 전달하는 웨이터”라는 마에스트로 정명훈의 말과 비슷한 얘기다.

최다은 기자 max@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