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티이미지뱅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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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큰증권발행(STO) 기반 조각투자를 향한 자본시장의 관심이 집중되고 있습니다. 안갯속에 가려져 있던 법제화 향방이 드러나기 시작하며, 미술품이나 영상 콘텐츠 등에 기반한 각종 금융상품 출시가 예고되고 있습니다. 조각투자 시장에 출사표를 던진 윤성욱 펀더풀 대표는 2016년 국내 1호 온라인 소액공모 사례인 영화 ‘인천상륙작전’의 투자를 담당했던 인물입니다. 20년 전 영화 ‘올드보이’ 투자를 시작으로 영상 콘텐츠 투자 ‘외길’을 걸어온 창업가에게, 한경 긱스(Geeks)가 STO 법제화로 달라질 조각투자 시장의 실질 변화를 물었습니다.

“영화 ‘헌트’에서 배우 이정재가 모는 멋진 차량이 나옵니다. 현대차 ‘그라나다’라는 모델입니다. 영화 끝나고 차는 폐기처분 됐어요. 이 차가 조각투자로 출시됐다면 어떨까요?”

현대차 '그라나다'. /현대차 홈페이지 캡처
현대차 '그라나다'. /현대차 홈페이지 캡처
현대차 그랜저의 전신, 그라나다는 1985년 단종됐다. 하지만 영화에서만큼은 존재감이 뚜렷했다. 시대 배경인 1983년을 떠올리게 하면서도, 제5공화국 시절 국가안전기획부 요원들의 암투를 그린 극의 긴장감과 잘 맞아떨어졌다는 평가다. 개봉 후엔 온라인상에서 구체적인 모델명을 확인하려는 자동차 애호가들의 문의가 이어졌다. 윤성욱 펀더풀 대표는 “만약 차가 폐기처분 되지 않고 STO 업체를 만났다면, 콘텐츠 지식재산권(IP)에 기반한 새로운 금융 상품이 탄생했을 수 있다”고 말했다.

윤 대표가 해당 차량을 언급하며 STO 기반 조각투자 상품의 특징이 다양성에 있음을 강조했다. 영화 조각투자, 음원 조각투자 등 시장에 익히 알려진 형태보다 잠재력이 크다는 것이다. 윤 대표는 “조각투자에 블록체인이 적용된다면, 해외 투자자의 본격적이 시장 진입이 이루어질 수 있다”며 “K-콘텐츠의 저력은 영화에서 파생될 수많은 금융상품을 낳게 되고, 해외 투자자에게 매력적인 선택지를 제공해 시장이 성장할 것”이라고 말했다.

K-콘텐츠, 크라우드 펀딩에서 조각투자로

윤성욱 펀더풀 대표. /펀더풀 제공
윤성욱 펀더풀 대표. /펀더풀 제공
윤 대표는 먼저 조각투자와 STO가 같은 용어가 아니란 점을 확실히 했다. 조각투자는 하나의 자산을 잘게 쪼개서 파는 방식이다. STO는 여기에 블록체인 기술을 붙여, 위·변조 가능성을 줄이는 과정 자체를 뜻한다. STO의 개념이 가상통화공개(ICO)에서 왔듯, 조각투자의 형태도 마냥 새로운 것은 아니다. 이전엔 온라인소액공모제도, 이른바 ‘증권형 크라우드 펀딩’이 있었다. 사업권 수익배당권을 기초로 만들어진 증권공모제도의 일종인데, 외형만큼은 조각투자와 유사하다. 직접 증권을 발행하지 않고 사업자와 투자자 사이를 중개했다는 점에서 차이는 있지만, 형태가 비슷한 사업자는 국내 시장에 처음부터 존재했던 셈이다.

2019년에 창업된 펀더풀은 이런 기준에서 업력이 짧지만은 않다. 2021년 3월 서비스를 시작해 국내 영화를 중심으로 뮤지컬, 드라마 등 영상 콘텐츠와 전시회를 증권형 크라우드 펀딩 형태로 내놓았다. 대표적으로 ‘범죄도시3’ ‘한산: 용의 출현’ 상품이 투자자들에게 알려져 있다. 펀더풀 플랫폼에선 현재까지 약 1만 5000명의 투자자가 69개 상품에 투자했다. 한국예탁결제원에 따르면, 지난해 펀더풀의 소액투자공모시장 청약금액점유율은 1위(39.91%)를 기록했다.

하지만 영화 업계서 증권형 크라우드 펀딩이 차지하는 규모는 크지 않은 것이 현실이다. 현재까지 펀더풀의 총투자자 모집액은 156억원가량이다. 금융당국의 유권해석은 업권 성장을 제한하고 있었다. 현행 자본시장법은 증권의 종류를 6개로 분류한다. 2016년 국내에 증권형 크라우드펀딩 제도가 시행될 당시, 금융당국은 업체들 상품을 사실상 채무증권이나 지분증권으로만 발행하도록 유도했다. 자산가치 산정이 어려운 투자계약증권은 당시 체계가 정비되지 못했기 때문이다. 채무증권이나 지분증권은 투자계약증권 대비 상품 구조에 대한 제약이 크다. 크라우드 펀딩 업체가 시장에서 채권 형태의 제한된 상품만 발행했던 이유다.

하지만 지난 7월 국회에서 자본시장법 개정안이 발의되며 상황이 바뀌었다. ‘STO 붐’과 맞물려, 투자계약증권의 본래 취지인 ‘특정 사업에 공동으로 투자하고 사업 손익을 받는 계약상 권리’가 STO 적용과 함께 제대로 작동될 길이 열린 것이다. 지난 11일엔 미술품 경매회사 케이옥션의 자회사 투게더아트가 금융감독원에 투자계약증권신고서를 처음으로 제출하기도 했다. 펀더풀 역시 지난 2월부터 KB증권, 한국투자증권, 신한투자증권과 손잡고 STO 시장 진출을 준비하고 있다.

'인천상륙작전' 투자하고 창업가로 변신

윤 대표는 20년간 약 200개 영화에 투자해왔다. 2003년 영화 ‘올드보이’와 ‘친구’의 제작사인 쇼이스트에 입사해, 한화와 엠벤처투자 등을 거쳤다. 직장만 바뀌었을 뿐, 하는 일은 비슷했다. 좋은 영화를 선별하고, 좋은 감독을 찾아 자금을 집행했다. 2015년 이직한 IBK기업은행에선 경력의 황금기를 달렸다. ‘명량’ ‘베테랑’ ‘국제시장’ ‘관상’ ‘검사외전’ 등의 영화 투자가 그의 손에서 이루어졌다.

2016년 영화 '인천상륙작전' 포스터. /한경DB
2016년 영화 '인천상륙작전' 포스터. /한경DB
2016년 영화 ‘인천상륙작전’은 윤 대표가 온라인 소액공모시장의 가능성을 확인할 수 있는 기회였다. 당시 영화는 국내 첫 증권형 크라우드펀딩 프로젝트로 선정돼 시장의 주목을 받았는데, 담당자로 선정된 그는 실무를 도맡으며 새로운 경험을 쌓았다. 이후 당시 금융위원회 회의에 오가며 연이 닿은 크라우드 펀딩 업체 와디즈에 잠시 이직했다가, 창업 기회를 포착하고 2019년 사업에 뛰어들었다.

그가 포착한 기회는 영화 투자 산업이 구조적으로 지닌 약점이었다. 영화가 한 편 나오기까지 투자금이 모이는 과정은 악전고투의 연속이다. 윤 대표는 “올드보이마저도 처음엔 투자금을 조달하지 못했다”며 “현재도 매출액 규모가 큰 제작사 약 30개의 작품만이 안정적인 자금을 유치할 수 있다”고 말했다. 온라인동영상서비스(OTT)의 부상도 창업 계기가 됐다. 넷플릭스 등 글로벌 플랫폼은 자본 투자와 동시에 지식재산권(IP) 전체를 가져가는 모델을 내세우기 시작했다. 제작사가 사업권을 공유하기 위해선 자금이 필요해진 것이다. 제작사든 리드 투자사든 돈은 언제나 모자랐지만, 폐쇄성이 짙었던 업계서 공모 개념 도입은 쉽지 않았다.

영화 제작 환경과 투자사의 논리를 모두 이해하고 있던 그는 조각투자 형태로 일반 투자자 자금을 모아 영화계에 유동성을 공급하고자 했다. 서비스 출시 2년, 창업가로서 소기의 성과는 있었다. 특히 ‘한산: 용의출현’은 수익률 11.08%을 기록하며 호평받기도 했다. 포트폴리오를 다각화하며 진출한 ‘YOSIGO 사진전’으론 수익률 145.09% ‘잭팟’을 터트려 시장 경험을 늘리기도 했다. 직장인에서 창업가로, 맨손으로 고군분투하며 얻어낸 결과다.

"STO, K-콘텐츠 새로운 자금 조달 창구"

펀더풀 플랫폼 화면. /펀더풀 제공
펀더풀 플랫폼 화면. /펀더풀 제공
STO 사업에 대한 창업가들의 기대감은 크지만, 안착될 형태는 불분명하다. 윤 대표는 우선 만기가 존재하는 투자계약증권 금융상품이 먼저 시장에 자리 잡을 것으로 내다봤다. 투자계약증권으로 투자자가 수익을 받는 방식은 배당, 투자자끼리의 거래로 얻는 유통 차익, 청산에 따라 발생하는 최종 수익 등이다. 윤 대표는 “작가의 미술품을 STO 기반 조각투자로 발행한다면 만기 개념을 설정하기 쉽지 않을 텐데, 이 경우 3가지 수익 형태 구현이 어렵다”며 “어떤 형태로든 사업자들이 상품 가치를 최종적으로 인정받을 수 있는 판매구조가 설정된 뒤 상품을 내놓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상품 가치가 오를 것이란 기대감을 만기라는 특정 시기로 묶지 않으면 유통도 이루어지기 힘들다는 예측에서다. 증시로 치면, 회사를 믿고 특정 종목 주식을 무한정 갖고 있을 투자자가 없다는 말과도 같다. 펀더풀은 현재도 만기를 설정한 조각투자 사업을 진행하고 있다. 영화는 개봉하는 순간 관객 수로 수익이 특정되기 때문이다. 불확실성이 큰 시장인 만큼, 펀더풀은 당분간 증권형 크라우드펀딩 상품과 STO기반 투자계약증권 사업을 병행한다는 계획도 갖고 있다. 특히 투자계약증권 사업의 경우, 현재 상품을 중개해주는 제작사 중 토큰 증권 발행을 원하는 업체와 함께해 간접적인 방식으로 사업을 시작하는 것을 검토하고 있다. 형태가 자유롭기 때문에, 영화 촬영에 쓰였던 소품 중 희소 가치가 높은 것들이 금융 상품으로 출시될 수 있다.

제약 조건은 산적해 있지만, 윤 대표는 STO의 가능성 자체를 높게 평가했다. 국경을 넘나드는, 블록체인이 지니는 기술적 특징 때문이다. 그는 “외국인 투자자가 K-콘텐츠에 투자한다면, 환전부터 투자 계좌 등록까지 신경 쓸 일이 한 두 가지가 아니다”며 “블록체인으로 만들어지는 토큰은 국가를 넘나드는 공통 화폐와 같다”고 했다. 윤 대표는 “STO는 콘텐츠 사업자의 새로운 자금 조달 창구 역할을 담당할 수 있을 것”이라며 “내실 있는 체계 마련이 진행돼 글로벌 서비스가 늘어날 수 있도록 펀더풀도 일조하겠다”고 말했다.

이시은 기자 see@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