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년을 늘리는 대신 임금을 깎는 ‘정년연장형 임금피크제’라고 해도 임금 삭감폭이 크면 무효라는 법원 판결이 나오면서 기업들의 셈법이 복잡해졌다. 지금까지 정년연장형 임금피크제를 둘러싼 소송은 모두 기업이 승소했고 고용노동부도 “정년연장형 임금피크제는 원칙적으로 유효”라는 입장이었다. 하지만 임금 삭감폭이 큰 임금피크제를 시행하는 기업은 향후 소송전에서 안심할 수 없게 됐다는 분석이 나온다.

연봉 대폭 삭감이 문제

임금피크제는 정년 변경이 없는 정년유지형과 정년을 늘리는 정년연장형으로 나뉜다. 국내에선 2013년 고령자고용법 개정에 따라 정년을 60세로 연장하는 과정에서 임금피크제를 도입한 기업이 많다. 고용부에 따르면 2013년 이후 임금피크제 도입 업체 중 87.3%가 정년연장형을 선택했다.

그동안 법원은 정년연장형 임금피크제는 연령 차별이 아니라고 판결했다. 한국농어촌공사 삼성화재 KT를 상대로 한 임금피크제 소송에서 모두 기업이 승소했다. 이런 판결의 바탕엔 ‘정년 연장 자체가 임금 삭감에 대한 보상’이란 판단이 깔려 있었다.

이번에 패소한 KB신용정보는 임금 삭감폭이 과도한 점이 문제가 됐다. 이 회사는 2016년 2월 노조와 체결한 단체협약에 따라 만 55세부터 임금피크제를 도입하는 대신 정년을 만 58세에서 60세로 연장했다. 대상 직원은 임금피크제를 적용받기 직전 연도 연봉을 기준으로 임금이 45~70%로 줄어든다. 일부 직원은 임금피크제 적용 첫해부터 연봉이 전년 대비 45% 수준으로 깎일 수 있는 것이다.

임금피크제를 적용받으면 아무리 성과를 많이 내도 임금피크제를 적용하지 않았을 때보다 연봉을 더 받기 어렵다. 임금피크제가 없다면 KB신용정보 직원은 만 55세 이후 원래 정년인 58세까지 3년간 기존 연봉의 300%(3년치)를 받을 수 있었다. 임금피크제 도입 후엔 성과평가에서 매년 최고 등급을 받아야 이 수준의 연봉을 받는 게 가능하다. 구체적으로 마케팅직은 5년간 성과평가에서 최고 등급(S) 한 번 이상 또는 두 번째 등급(A+) 두 번 이상, 행정직은 5년 내내 S등급을 받아야 기존 연봉의 300%를 받을 수 있다. 만약 이 기간 매년 최저 등급을 받는다면 기존 연봉의 225%(45%×5년)만 받는다. 재판부는 “근무기간이 2년 더 늘었음에도 임금총액은 오히려 삭감될 가능성이 크다”고 지적했다.

임금피크제 소송에서 승소한 기업들은 임금 삭감폭이 크지 않다. 예컨대 KT는 정년을 만 58세에서 60세로 연장하면서 임금피크제 적용 시점부터 정년까지 매년 10%포인트씩 임금이 줄어든다. 삼성화재도 정년을 만 55세에서 60세로 변경하면서 만 56세부터 4년에 걸쳐 연봉이 기존의 90%에서 60%로 차례로 낮아지도록 임금피크제를 설계했다.

기업들 다시 혼란

임금피크제를 둘러싼 논란은 이번이 처음은 아니다. 지난해 5월 대법원이 “합리적 이유 없이 나이만으로 직원 임금을 삭감하는 임금피크제는 연령 차별”이란 판결을 한 후 큰 파장이 일었다. 하지만 이후 하급심의 정년연장형 임금피크제 소송에서 법원이 기업 손을 들어주면서 기업들도 안도하는 분위기였다.

하지만 이번 KB신용정보 관련 판결로 정년유지형은 물론 정년연장형 임금피크제도 상황에 따라선 문제가 될 수 있다는 점이 드러나면서 기업들은 다시 혼란에 빠졌다. 한 노동전문 변호사는 “정년 연장이냐 유지냐에 관계없이 임금 삭감 수준이 소송의 승패를 가르는 요인이 될 수 있다”고 말했다.

곽용희/김진성 기자 jskim1028@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