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게티이미지뱅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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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을 떠나기 전 자녀 중 한 사람에게 1000억원 상당의 재산을 모두 물려준다는 유언증서를 썼더라도, 그 후 재산 양도 철회서를 작성했다면 해당 유언 내용을 무효로 봐야한다는 법원 판결이 나왔다. 재판부는 망인이 결정을 번복한 당시 본인이 직접 재산을 관리하겠다는 뜻을 보이는 등 여러 정황에 비춰볼 때 재산 양도를 철회한 결정에 유언도 없었던 일로 하겠다는 뜻이 담겼다고 판단했다.

23일 법조계에 따르면 서울중앙지방법원 민사14부(서보민 부장판사)는 중소기업 A사의 대표이사인 B씨가 낸 유언 효력 확인소송에서 최근 원고 패소 판결을 내렸다. 재판부는 원고의 어머니인 C씨가 생전에 쓴 “전 재산을 B씨에게 이전하겠다”는 유언증서의 내용이 이미 철회됐다고 결론 지었다.

C씨는 2009년 6월 자신의 명의로 된 예금과 유가증권, 부동산 등 약 1000억원 규모 재산을 다섯 자녀 중 삼남인 B씨에게 이전하겠다는 내용을 담은 A4용지 4쪽 분량의 유언증서를 썼다. 법무법인으로부터 해당 유언증서가 본인의 의사로 적었다는 공증(사서증서 인증)도 받았다. 유언증서 작성 5일 전엔 재산 양도서를 작성해 이 역시 사서증서로 인증받았다. C씨는 비슷한 시기 유언증서와 똑같은 내용을 녹음해 남기기도 했다.

그런데 C씨가 2012년 1월 재산 양도계획을 모두 철회한다는 뜻을 담은 문서를 작성하면서 상황이 급변했다. 유언 내용이 여전히 유효한지를 두고 자녀들간 논쟁이 벌어졌다. 그러다 C씨가 2019년 8월 사망하면서 유언 효력을 둘러싼 상속분쟁이 본격화됐다. B씨는 2020년 7월 어머니의 유언에 효력이 있음을 인정해달라는 소송을 제기했다. 그는 “철회 대상은 양도서일뿐 유언 내용까지 철회된 것은 아니다”라고 주장했다. 나머지 형제들은 “어머니의 유언은 양도 철회로 취소됐다”며 맞섰다.

법원에선 다른 형제들의 주장이 받아들여졌다. 재판부는 “C씨는 양도 철회서를 작성한 시기에 한 시중은행에도 ‘다시 재산을 직접 관리할 생각으로 B씨로부터 모든 은행 통장을 돌려받았지만 연로한 탓에 (한꺼번에) 여러 은행과 거래할 수 없어서 다른 은행의 정기예금을 중도 해지해 이체했다’는 서신을 보냈다”며 “이 같은 행위들은 유언 내용과 일치하지 않기 때문에 유언이 철회됐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고 판단했다.

재판부는 유언에 나온 ‘양도’라는 단어가 자체가 상속을 의미하지 않을 가능성에도 주목했다. 재판부는 “C씨와 원고와의 관계, 양도서와 유언증서를 작성한 시간 간격과 경위, 양도일을 양도서 작성일과 같은 날로 특정하면서도 양도대금 등 다른 조건을 전혀 적지 않은 점 등을 고려하면 C씨는 양도라는 단어를 (생전) 증여의 의미로 사용한 것으로 보인다”고 밝혔다. 그러면서 “유언증서와 양도서 내용이 별개라면 C씨는 애초에 원고에게 모든 재산을 이전하려고 했다가 불과 5일만에 생각이 바뀌어 ‘살아있는 동안엔 자신이 직접 재산을 관리하겠다’며 유언을 하고, 또 2년7개월 후엔 재산권 행사에 문제가 생길까봐 양도 철회를 한 셈이 된다”고 지적했다.

법조계에선 이번 판결로 유언의 형식적 요건만큼이나 당시 망인의 언행도 상속분쟁에서 중요한 증거로 다뤄질 여지가 더 커졌다고 보고 있다. 이 소송에서 피고 측을 대리한 법무법인 바른의 박상오 변호사는 “망인의 생전 행위를 구체적으로 분석해 유언에 담긴 진정한 의사를 인정받았다는 의미가 크다”며 “앞으로 비슷한 유형의 상속분쟁에서도 참고가 될만한 사례”라고 말했다.

김진성 기자 jskim1028@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