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시아가 우크라이나 침공 이후 각종 제재 속에서도 미국과 유럽의 첨단제품과 군수 물품을 쉽게 구하고 있는 것으로 파악됐다. 미국과 유럽의 컴퓨터 칩과 군사용 제품 등이 러시아 주변국들을 통해 러시아로 유입되고 있어서다. 이런 '우회 수입'으로 인해 국제 사회의 대(對) 러시아 제재가 무력해지고 있다는 지적이 나온다.

월스트리트저널(WSJ)은 14일(현지시간) 미국과 유럽연합(EU)이 러시아 주변국으로 수출하는 물품이 급증하고 있다고 보도했다. WSJ는 이런 나라를 통해 서방 국가들의 첨단제품과 군수용품이 러시아로 들어가고 있다고 분석했다.

WSJ는 러시아로 물품을 공급하는 대표적 국가로 5개국을 꼽았다. 카자흐스탄과 우즈베키스탄, 키르기스스탄, 조지아, 아르메니아 등이다.

WSJ에 따르면 미국과 EU가 이들 국가로 수출한 금액은 2021년 146억달러에서 지난해 243억달러로 증가했다. 같은 기간 이들 국가가 러시아로 수출한 금액은 50% 늘었다.

국가별로는 카자흐스탄이 가장 높은 비중을 차지했다. 서방 국가에서 카자흐스탄으로 수출되는 금액은 2021년 72억달러에서 지난해 119억달러로 증가했다. 동일한 기간 조지아의 수입액도 31억달러에서 46억달러로 늘어 2위를 기록했다. 우즈베키스탄 수입액은 31억달러에서 42억달러로 늘어 그 다음을 차지했다.

수출액의 상당 부분이 반도체 같은 첨단 제품과 군사 용품인 것으로 파악됐다. 유엔에 따르면 지난해 미국과 EU에서 아르메니아로 850만달러 이상의 집적회로(IC)를 수출했다. 2021년 수출액(53만 달러)의 16배가 넘는 수치다. 아르메니아에서 러시아로 수출한 IC도 2021년만 해도 2000달러에도 못미쳤지만 지난해 1300만 달러로 급증했다.

WSJ는 "키르기스스탄은 레이저를, 우즈베키스탄은 전력 기구를 각각 러시아에 수출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WSJ는 유럽 관리들을 인용 "'유라시아 회전교차로'(the Eurasian roundabout)로 불리는 이 무역경로가 각종 제재 속에서도 러시아가 서방 국가들의 첨단제품을 성공적으로 확보하고 있다는 신호로 볼 수 있다"고 평가했다.

실제 러시아 기업인 아이멕스 엑스퍼트는 웹사이트를 통해 "카자흐스탄을 통해 유럽과 미국 상품을 수입할 수 있다"고 홍보하고 있다. 이 회사는 해당 문구에 대한 논평 요청을 거부했다고 WSJ는 전했다.

WSJ는 "미국과 유럽은 지난해 2월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이후 다양한 제재를 시행하고 있지만 러시아는 새로운 무역 경로를 통해 서방 국가들의 첨단 제품을 손쉽게 구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워싱턴=정인설 특파원 surisuri@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