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집은 구천원, 원한다면 인터넷에서 찾아볼 수도 있어 관람료는 없고 공짜야.”

책값 40%씩 줄인상…"시집 9000원 시대 끝났다"
2021년 출간된 정다연의 시집 <서로에게 기대서 끝까지>에 실린 시 ‘커트 피스’에 나오는 대목이다. ‘9000원짜리 시집’에 대한 서글픈 자화상이다. 삶을 갈아넣어 쓴 시집이 1만원도 안 되는 가격에 팔리고, 인터넷에서 제멋대로 공유하는 현실을 그렸다. 이 책이 세상에 나온 지 2년도 안 됐는데, 9000원짜리 시집은 벌써 옛말이 됐다. 종이값과 잉크값 폭등 여파로 이제 1만원을 밑도는 시집은 어디에서도 찾아보기 힘들게 돼서다.

11일 한국출판문화산업진흥원에 따르면 지난해 정가가 변경된 책은 총 7732종이다. 이 중 가격을 올린 건 6222종이다. 2021년 정가를 인상한 책(3480종)의 두 배에 이른다. 지난해 정가를 올린 책은 2014년 도서정가제 전면 시행 이후 가장 많았다. 진흥원 관계자는 “종이값, 잉크 가격 등 원자재 인상 영향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도서정가제는 말 그대로 책에 ‘적정 가격’을 매기는 제도다. 출판사가 정한 책값을 서점이 10% 넘게 할인해 팔지 못하도록 한 것다. 출판 생태계를 망가뜨리는 출혈 경쟁을 막는다는 취지로 도입했다. 다만 나온 지 12개월이 지난 책에 대해서는 출판사가 정가를 높이거나 낮출 수 있도록 했다. 이 경우 진흥원에 변경 사실을 등록해야 한다.

그동안 출판사들은 책값 인상 요인이 있어도 최대한 미뤘다. 안 그래도 책 읽는 사람이 줄어드는 마당에 가격마저 올리면 독자들이 책을 외면할까 우려돼서다. 이런 상황을 잘 아는 출판사들이 작년에만 6000종이 넘는 책값을 올린 데는 그럴 수밖에 없는 이유가 있었다.

가장 큰 이유는 종이의 원료인 펄프 가격 폭등이다. 산업통상자원부에 따르면 2021년 12월 t당 평균 655달러였던 미국 남부산 혼합활엽수펄프 가격은 지난해 12월 1030달러로 50% 넘게 치솟았다. 이로 인해 책값도 30~40%씩 올랐다. 지난해 12월 1일자로 정가를 올린 책 675종의 평균 인상폭은 40% 수준이었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제값 못 받는 책’으로 통하는 시집 가격도 1만원을 넘겼다. 창작과비평사 ‘창비시선’, 민음사 ‘민음의 시’, ‘문학과지성사 시인선’은 그간 9000~1만원이던 시집 정가를 권당 1만2000원 안팎으로 약 30% 인상했다.

책값은 올해도 상당폭 오를 전망이다. 올해 1월 1일자로 정가를 올린 책은 729종으로 지난해 같은 기간(334종)의 두 배가 넘는다. 제지업계와 증권가에서는 상반기까지 펄프 가격이 역대 최고치 수준을 유지할 것으로 예측하고 있다. 흥국증권 등은 올해 예정된 유럽·남미 펄프업체의 증설로 하반기에 국제 펄프 가격 상승세가 주춤해진다 해도 연평균 가격은 t당 900달러를 웃돌 것으로 내다보고 있다. 2021년에는 t당 771달러 수준이었다.

책값이 오르면 작가가 받는 원고료도 오를까. 정가의 일정 비율을 인세로 받는 경우에는 그렇다. 대다수 작가는 책값의 10% 안팎을 인세로 챙긴다.

한 출판계 관계자는 “원자재 가격이 너무 많이 오른 탓에 출판사들이 책값을 인상해도 남는 건 거의 없다”며 “작가 처우를 개선하려면 생산비 부담이 줄어드는 동시에 책 판매도 늘어야 한다”고 말했다.

구은서 기자 koo@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