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건호 칼럼] 정원 늘린다고 반도체 인재 길러지나
반도체 인력난을 보면서 할 일을 제때 하지 않아 치르는 대가가 얼마나 혹독한지 실감하게 된다. 이명박 정부는 등록금을 꽁꽁 묶어 대학 재정난에 일조했다. 박근혜·문재인 정부는 대학 경영 위기를 방치했고, 구조조정 찬스도 놓쳤다. 어느 정부도 건드리지 못한 수도권 규제는 성역으로 남아 대학 정원에 대못을 박았다. 이 모든 덤터기를 윤석열 정부가 뒤집어쓸 판이다.

이명박 정부와 당시 여당인 한나라당(현 국민의힘)은 대학생들의 거센 등록금 인하 요구에 못 이겨 2011년 9월 ‘반값 등록금’ 정책을 내놨다. 이듬해 등록금을 올리면 국고 지원을 못 받는 국가장학금 제도를 도입했다. 박근혜 정부는 출범 5개월 만에 대학구조개혁위원회를 꾸리고 대학 정원을 5만9000여 명 줄이는 등 나름 성과를 냈다. 다만 사학법인 해산 때 남는 재산 일부를 설립자에게 돌려주는 내용으로 사립학교법 개정을 추진했지만, 당시 야당(현 더불어민주당)의 반대를 넘지 못했다. 학령인구 감소 우려가 그 어느 때보다 컸던 문재인 정부 때는 5년간 대학 정원을 1만6000여 명 감축하는 데 그쳤다. 이전 정부의 27%에 불과하다. 골치 아픈 문제에 나서기를 꺼린 데다 지방 민심의 눈치를 봤다. 이렇게 시한폭탄은 돌고 돌아 윤 정부로 넘어왔다.

수도권 대학의 반도체 학과 정원 확대는 대학 구조조정, 재정 확충과 분리해 생각할 수 없다. 내년엔 대입 지원자 수가 입학 정원보다 10만 명 모자란다. 한덕수 국무총리가 밝힌 대로 수도권대·지방대의 첨단학과 정원을 같이 늘리려면 다른 학과 구조조정이 불가피하다. 학령인구 급감 시대에 대학 정원 조정은 고통을 수반하는 제로섬 게임이다. 선택적·차별적 지원으로 부실·한계 대학의 청산·통폐합을 끌어내지 못하면 말짱 도루묵이다. 자발적 퇴로를 선택한 대학이 안정적으로 해산할 수 있도록 법·제도적 기반을 갖춘 미국, 일본 사례를 본받는 데 주저할 이유가 없다.

대학 정원 조정 못지않게 심각한 문제는 대학 재정난이다. 최신 실습 장비를 들이고 유능한 교수를 초빙하려면 곳간을 탈탈 털어도 어림없다. 국내 사립대 연평균 등록금은 2010년 751만4000원에서 지난해 752만3700원으로 제자리걸음이다. 이 기간 물가상승률은 20%가 넘는다. 서울 주요 사립대 10곳 중 8곳은 지난해 운영적자를 냈다. 알 만한 국내 대학교수 연봉은 8000만~1억2000만원 수준인데, 국내 대기업이나 해외로 가면 몇 배를 더 받는다. 해외 석학, 인재 유치는 언감생심이다.

교수진이 탄탄하지 못하면 인재 양성 구호도 공염불이다. 반도체를 전공한 신입 사원을 뽑아도 1~2년 재교육해야 하는 게 기업들의 현실이다. “반도체 기술 진보 속도가 급속도로 빨라져 공학을 넘어 종합과학 수준으로 다뤄야 하는 분야가 됐지만, 대학 교육과 졸업생 수준은 한참 뒤처져 있다”는 하소연이 쏟아진다. 퇴직한 전문 인력을 교수진으로 채용하고, 기업 첨단 시설을 활용하는 이동 수업을 늘릴 수 있도록 관련 규제를 풀어야 한다.

교육부가 이제서야 ‘등록금 자율화’를 꺼냈지만, 고물가에 학생·학부모 반발을 감안하면 타이밍은 최악이다. 차라리 이번 기회에 발상을 전환해 기여입학제 같은 제도를 검토해보면 어떨까. 언제까지 해묵은 국민 정서 타령만 하고 있을 텐가. 부작용을 막을 장치를 마련하고 필요성을 설득하면 반대할 국민이 얼마나 될까. 하버드대 프린스턴대 등 미국 명문 사립대에선 오래전부터 시행 중인 제도다. 물론 경직적인 대학 재정 운용과 수익사업에 대한 빗장도 과감히 열어줘야 한다.

반도체는 한국 수출의 20%를 책임지는 경제 버팀목이다. 경제 안보 시대의 전략적 가치는 수치로 환산할 수 없다. ‘국가안보’와 ‘비상 상황’이라는 명분이 있는데 무엇인들 못 하겠나. 최악의 가뭄에도 농업용수를 반도체 공장으로 돌린 대만과 같은 의지와 배짱이 새 정부에 있는지 시험대에 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