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건호 칼럼] 삼성 감동시킨 美 테일러시 결의안
“미국에도 삼성전자 평택공장 같은 시설이 들어서 최첨단 칩을 제조합니다. 바로 텍사스주 테일러시입니다.”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이 지난 20일 평택 삼성전자 반도체 공장을 방문해 한 말이다. 그는 이날 테일러시에 들어설 삼성전자 파운드리(반도체 수탁생산) 공장에 대한 기대를 한껏 드러냈다.

미국 텍사스주의 소도시 테일러시가 인근 오스틴과 애리조나, 뉴욕주 등 쟁쟁한 후보들을 제치고 삼성전자 공장을 유치한 과정을 보면 ‘비즈니스 프렌들리(기업 친화적)’라는 말이 무엇인지 실감 난다. 삼성전자의 기존 파운드리 공장이 있는 오스틴이 소재·부품·장비 협력 생태계가 갖춰져 있어 훨씬 유리했지만, 테일러시가 판을 뒤집었다.

테일러시가 역전에 성공한 요인은 178페이지짜리 결의안에 잘 드러나 있다. 유치전이 막바지로 치닫던 작년 9월 테일러시는 파격적인 세금 감면과 함께 안정적인 용수 공급을 약속한 결의안을 가결했다. 반도체 공장 신설 때 가장 먼저 고민하는 문제 중 하나가 용수라는 점을 파고든 것이다. 반도체 업체들은 공업용수에서 불순물을 제거한 초순수(ultrapure water)를 하루 수십만t씩 세정·식각공정에 사용한다. 삼성전자 오스틴공장은 지난해 2월 기습한파로 용수와 전기 공급이 끊겨 한 달 이상 셧다운되면서 4000억원가량의 손실을 보기도 했다. 테일러시는 이를 의식한 듯 결의안에 분기별 최대 용수 공급량과 폐수처리 계획은 물론 수질, 가격 조건까지 명시해 삼성의 불안을 잠재우기 위해 공을 들였다.

세금 혜택 면에서도 오스틴을 압도했다. 삼성은 오스틴에 20년 동안 9000억원가량의 세금 감면을 요청했는데, 오스틴은 15년간 3000억원 감면을 제시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에 비해 테일러시는 재산세 감면 등을 통해 20년간 1조2000억원(약 10억달러)을 깎아주겠다는 파격 조건을 내걸었다. 전례 없는 수준이지만, 삼성 공장 유치에 따른 혜택이 더 클 것이라고 판단한 것이다.

결국 삼성전자는 작년 11월 테일러시를 낙점했다. 이곳에 들어설 삼성전자의 두 번째 미국 파운드리 공장은 올 상반기 착공돼 2024년 하반기 가동될 예정이다. 투자 규모는 170억달러(약 20조원)로 삼성전자의 미국 투자 중 최대다. 삼성전자는 미세공정을 적용해 5G(5세대) 통신, 고성능 컴퓨팅(HPC), AI(인공지능) 등 다양한 분야의 시스템 반도체를 생산할 계획이다. 테일러시는 양질의 일자리 2000개를 확보했다.

우리나라는 지난해 5월 문재인 대통령이 참석한 가운데 삼성전자 평택공장에서 ‘K반도체 전략’을 발표하고 연구개발(R&D) 세액공제 확대, 화학물질 규제 합리화, 반도체특별법 제정 등을 추진하기로 했다. 하지만 반도체특별법 논의 과정에서 대기업의 시설 투자에 대한 세액공제율을 현행 최대 10%에서 50%로 늘려달라는 업계 요청은 수용되지 않았다. 인력난 해소를 위한 수도권대학 정원 확대와 R&D 인력의 주 52시간 근로제 탄력 적용도 ‘대기업 특혜’ ‘지역균형 발전’이라는 벽에 막혔다.

삼성전자는 평택공장에 전기를 공급할 송전탑 건립을 둘러싼 지역 주민 갈등을 푸는 데만 5년이 걸렸다. 신설될 평택 4·5·6공장에서 사용할 공업용수(1일 25만t)를 확보하는 데도 애를 먹었다. 2019년 2월 용인에 120조원짜리 반도체 클러스터를 조성하겠다고 발표한 SK하이닉스도 폐수 방류에 따른 환경영향평가 등에 2년을 기다려야 했고 토지보상 문제로 아직 첫 삽을 뜨지 못하고 있다.

삼성 현대자동차 SK LG 등 국내 대기업들이 친기업을 표방하고 나선 윤석열 정부 출범을 맞아 1000조원이 넘는 금액을 반도체 배터리 바이오 전기차 등 미래 먹거리 분야에 쏟아붓기로 했다. 하지만 투자를 가로막는 대기업 차별 규제와 수도권총량제, 지역 이기주의 등을 뿌리 뽑지 않는 한 계획이 실현되기 힘들다. 테일러시처럼 ‘비즈니스 프렌들리’ 정책을 서두르지 않으면 국내에 남을 기업이 많지 않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