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친 환경을 헤쳐나가는 끝없는 진화, 에코리즘
하버드 대학 컴퓨터 과학 및 응용 수학 교수인 레슬리 밸리언트(Leslie Valiant) 교수는 2010년 튜링 상을 받은 학자이다. 컴퓨팅 이론의 대가로서 그가 2013년에 출간했던 ‘얼추거의맞기(Probably Approximately Correct(PAC)’라는 제목의 책이 2021년 11월에 국내에 소개되었다. 역자는 이광근 서울대 컴퓨터공학부 교수이다. 역자 역시 전문 학자이기 때문에 책의 번역 내용은 매우 훌륭하다. 특히 많은 전문 용어를 이해하기 쉬운 우리 말로 풀어 번역해 매우 신선하면서 도입한 단어들이 아주 흥미롭다. 예를 들어 PAC을 ‘얼추 거의 맞기’로 한 것이나 우리가 흔히 추론 또는 논증이라고 하던 reasoning을 ‘이치 따지기’로 번역한 것이 대표적이다.

그는 책에서 기계 학습을 보다 근본적으로 이해하도록 하는 것만 아니라 학습 과학이라는 새로운 영역을 소개한다. 기계 학습은 매우 복잡하고 이론이 없는 데이터에서도 학습이· 가능하다는 것을 보임으로 크게 발전해 왔다. 그는 특히 자연에서 생명체가 헤쳐나가는 방법이 모두 환경으로부터 학습한 결과이고 이 과정을 기계적인 계산으로 이해할 수 있다고 계산 학습의 영역을 확장한다. 그는 이런 학습 능력을 갖춘 알고리즘을 ‘에코리즘(ecorithm)’이라고 부른다.
책은 앞부분에서 튜링의 1930년대 논문에서 ‘기계적인 계산’이라는 개념이 정의되고 그의 보편 만능 기계 개념과 기계적인 계산으로 불가능한 문제가 있음을 제시한 것이 얼마나 컴퓨터 과학에서 중요한 의미가 있는지 강조한다. 밸리언트 교수는 튜링의 성과가 물리학에서 뉴턴에 비견할 수 있다고 찬사를 보낸다.
이후 컴퓨팅 이론에서 얘기하는 계산 복잡도와 다양한 문제 클래스를 일반인이 쉽게 알 수 있도록 설명한다. 사실 이런 이론이 없다면 컴퓨터 과학은 단지 프로그래밍 기법 만을 얘기하는 분야가 되었을 수 있다. 꾸준히 기계 학습의 이론적 토대를 세우는데 공헌한 저자 역시 계산 복잡도 영역에서 대가로 인정받은 사람이다.

저자는 나아가 다윈의 진화이론도 계산 학습 모델로 모델링이 가능할 것이고 이를 통해 좀 더 명확한 과학이 될 것이라고 주장한다. 학습 과정으로 진화를 바라보면 정량적으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라는 얘기이다. 이때 PAC 학습의 목표가 진화에서는 적합도이며 더 좋은 성능이 목표 함수가 된다.
책은 이후 학습가능함이란 무엇이고, 지능을 위해서는 이치 따지기가 필요하며 학습과 이치 따지기를 모두 다루기 위한 ‘튼튼 논리(robust logic))’를 제안한다. 2021년 삼성 AI 포럼에 초대 받은 밸리언트 교수는 ‘아리스토텔레스는 땅콩을 좋아했을까?’라는 질문에 답을 할 수 있기 위해서는 기계 학습에 이치 따지기가 합쳐져야 하고 이를 위한 자신의 제안이 ‘튼튼 논리’라고 발표했다.
이 책은 일반적인 인공 지능의 얘기보다 기계 학습의 본질적인 특성이 무엇이고, 이를 확장하면 생명체를 이해할 수 있는 수준이 될 것이고, 에코리즘이 지능의 핵심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아직도 풀어야 하는 많은 과제가 남아 있는 것도 사실이고, 지능을 연구하기 위해서는 결국 사람 진화의 결과를 이해해야 하는 어려움이 있다.

이 책과 함께 읽고 있는 책은 유명 신경 과학자인 안토니오 다마지오의 ‘느끼고 아는 존재’인데 지능의 문제를 본질적으로 이해하는데 도움이 된다. 인공지능 연구는 앞으로도 근본적인 지능의 문제를 조금씩 해결해 보면서 다양한 시각으로 접근해야 새로운 단계로 넘어 갈 수 있을 것이다.

※책과얽힘
거친 환경을 헤쳐나가는 끝없는 진화, 에코리즘
국내에서 보기 드문 과학기술 전문 큐레이팅 책방이다.서울 강남구청역 인근에 있다. 기술과 정책 전문가들이 수시로 모이는 사회적 공간, 커뮤니티 역할도 하고 있다. 모든 책은 공학박사인 주인장(한상기)이 엄선해 판매한다. 페이스북에서 책과얽힘을 검색해도 만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