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약금이 수수되지 않고 있는 계약의 효력에 관해 최근 1,2심에서 다른 판단을 하고 있어 소개한다.
■ 사안의 개요
사안의 개요는 다음과 같다(이해를 돕기 위하여 실제 사안을 압축하여 정리한다).
甲 소유명의로 된 아파트를 甲의 장모인 乙이 대리인 자격으로 나와 丙에게 매매하는 계약을 체결했다. 계약금은 6천만원으로 정했지만, 계약당일 丙이 준비한 돈이 전혀 없어 계약금은 다음날 지급하기로 약속했다.
하지만, 계약을 체결한 바로 그날 乙은 아파트매매사실을 甲에게 보고했으나 甲으로부터 아파트매매를 인정할 수 없다는 이야기를 듣게되자, 다음날 오전에 바로 이 사실을 丙에게 알리고 ‘계약진행을 할 수 없으니 계약금을 송금하지 말라’고 통고했는데, 丙은 이에 불구하고 계약금 6천만원을 일방적으로 송금해버렸다. 그후 甲과 乙은 매매계약의 효력을 부인하고 이전등기를 거부하면서, 일방적으로 송금된 계약금 6천만원도 丙 앞으로 변제공탁하는 방법으로 되돌려주었다. 이에 丙은, 甲과 乙을 공동피고로 계약서상 위약금 상당의 손해배상청구소송을 제기했는데, 甲을 주위적으로 乙을 예비적피고로 삼았다.
■ 법원의 판단
이에 대해 1심 법원은, 乙의 대리권이나 표현대리책임을 인정할 아무런 증거가 없다는 점에서 甲에 대한 청구는 인정하지 않은 반면, 乙에 대해서는 無權代理人으로서의 배상책임을 인정했다(다만 계약서상의 정해진 위약금은 비록 6천만원이지만, 계약 다음날 계약철회의 의사가 표시되고 지급받은 계약금을 바로 돌려준 점 등을 감안하여 배상액은 2천만원으로 감액하였다).
이에 반해 항소심 법원(서울고등법원 2007. 9. 20. 선고 2006나107557호)은, 甲에 대한 청구를 인정하지 않은 점은 1심 법원과 결론을 같이 했지만, 무권대리인인 乙에 대해서는 다른 판단을 하였다. 계약금이 수수되지 않은 계약의 효력에 대해 1심 법원과 다른 견해를 취했기 때문인데, 계약금이 수수되지 않고 있는 단계에서의 계약효력에 대해 항소심 재판부는 “--계약금은 연혁적으로 계약체결의 증거로서의 성질을 가질 뿐만 아니라 계약에 구속력을 부여하는 수단으로서 기능하여 온 점, 민법 제565조도 계약당시에 계약금이 교부된 경우에 원칙적으로 계약해제권 유보를 위한 해약금의 성질을 가지는 것으로 규정하고 있는 점 등을 감안할 때, 당사자 사이에 매매계약을 체결함에 있어서 매수인이 매도인에게 계약금을 지급하기로 약정하였음에도 미처 이를 교부하거나 실제로 그와 동일한 이익을 받은 단계에 나아가지 못한 상태라면, 계약금계약은 요물계약이기 때문에 아직 성립하였다고 볼 수 없음은 물론, 약정에 따른 계약금이 지급되기 전까지는 계약당사자의 어느 일방이든 그 계약에 구속되지 않고 자유로이 이를 파기할 수 있도록 계약해제권이 유보되어 있다고 봄이 상당하고, 이 때 그 해제를 위하여 매수인이 미처 지급하지 못한 계약금을 매도인에게 지급할 의무를 여전히 부담한다거나 그 해제에 대한 책임으로 매도인이 매수인에게 약정한 계약금의 배액을 지급할 의무가 생긴다고 볼 수는 없을 것이고, 이러한 법리는 계약금에 관하여 위약금약정이 있는 경우에도 마찬가지이다”라고 판단하였다.
■ 이와같은 항소심 판단은, 계약금이 수수되지 않는 단계의 계약을 경솔하게 생각하는 사회통념을 반영한 판단으로 이해되는 측면은 있지만, 해약에 관한 법리에서나, 계약금이 교부되지 않은 상태에서의 계약 효력을 일반적으로 부정하는 것은 문제가 있다고 본다. 법리를 떠나서라도 약정에 따른 계약금이 지급되기 전까지는 계약당사자의 어느 일방이든 그 계약에 구속되지 않고 자유로이 이를 파기할 수 있도록 계약해제권이 유보되어 있다는 항소심의 판단은 보편화되기는 어렵고, 적어도 사안에 따라 구체적, 개별적으로 해석해야 될 문제가 아닌가하는 생각이 든다. 향후 논쟁이 될 수 있을 것으로 본다(참고로, 예전에 필자가 이 문제에 대해 기고한 글을 첨부한다). -이상-

■ 민법 제135조 (무권대리인의 상대방에 대한 책임)
①타인의 대리인으로 계약을 한 자가 그 대리권을 증명하지 못하고 또 본인의 추인을 얻지 못한 때에는 상대방의 선택에 좇아 계약의 이행 또는 손해배상의 책임이 있다.
②상대방이 대리권 없음을 알았거나 알 수 있었을 때 또는 대리인으로 계약한 자가 행위능력이 없는 때에는 전항의 규정을 적용하지 아니한다.
■ 계약금 없는 계약, 경솔하게 생각하지 말아야
계약금 수수가 동반되지 않는 계약도 있을 수 있을까? 물론, 존재한다. 법적으로는 계약금이 계약의 필수요소는 아니기 때문이다. 따라서 계약금을 정하지 않고 몇 달 뒤에 잔금을 주고 부동산을 이전등기 받는다는 식의 계약도 당연히 가능하다.
그렇다면, 이렇게 계약금을 정하지 않은 계약이 체결되었다면, 계약당사자 일방이 임의로 계약을 해제할 수는 있을까? 이 점에 대해서는 많은 사람들이 오해를 하고 있다. 대다수의 사람들은, 계약을 체결하면서 계약금을 수수하지 않으면 계약의 구속력이 거의 없는 것으로 생각한다. 그 이유는 아마도, 전체 거래금액에서 계약금이 차지하는 비중이 클수록 계약금 액수에 비례해서 계약위반에 따른 불이익이 크다고 생각하고, 또 해약하기 위해서는 약정된 계약금만큼의 불이익을 감수하면 된다고 생각하는 연장선에서, 계약금이 적은 계약은 계약에서 오는 구속력이 약해지기 때문에 극단적으로 계약금이 아예 없는 경우에는 구속력이 거의 없거나 전혀 없다고 판단하기 때문이다. 쉽게 예를 들자면, 학교 근처 하숙집을 구할 때 임대차계약하고 몇 십 만원 맡겨두고 오는 경우에 계약의 구속력이라는 것은 맡기고 온 그 계약금 액수만큼의 부담일 뿐이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 때문에 계약금이 전혀 수수되지 않은 계약을 너무 쉽게 생각하고 경솔하게 접근하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이런 생각은 크게 오해일 수 있다. 오히려, 계약금 없는 계약이 계약의 구속력이라는 면에서는 더 막강한 효력을 가질 수 있다. 그 이유는 다음과 같다. 해약에 관한 규정인 민법 제565조를 보면, “매매의 당사자일방이 계약당시에 금전 기타 물건을 계약금, 보증금등의 명목으로 상대방에게 교부한 때에는 당사자간에 다른 약정이 없는 한 당사자의 일방이 이행에 착수할 때까지 교부자는 이를 포기하고 수령자는 그 배액을 상환하여 매매계약을 해제할 수 있다”라고 하여, 계약금이 교부된 때는 계약당사자간에 수수된 계약금 정도의 손해를 감수하면 일방적으로 계약을 해제할 수 있다는 약속을 한 것으로 추정하고 있는데, 이 규정을 반대로 해석하면, 계약금이 수수되지 않은 계약에서는 이런 일방적인 해약권을 행사할 수 없게 되는 것이다.
물론, 계약금 없는 계약이 체결될 경우 무조건적인 구속력이 있는 것은 아니다. 예를 들어, 계약금 없이 체결된 약속을 법적인 구속력이 있는 계약이 아니라고 볼 수 있는 예외적인 경우도 있을 수 있고, 또는 계약에서 특별히 해제사유로 정하는 약정해제사유가 발생하거나, 상대방이 계약이행을 지체하거나 계약의 목적달성이 불가능한 상황이 발생하는 법정해제사유가 발생하면 그 이유로 계약을 종료시킬 수 있다. 다만, 상대방의 동의 없이 계약금액 정도의 불이익을 부담하고 계약의 구속에서 벗어날 수 있는 방법이 없다는 것이다. 결국, 이런 해약을 염두에 둔다면 매우 적은 금액이라도 계약금을 약정할 필요가 반드시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현실은, 계약금 없는 계약이 일상에서 흔치않기 때문에 그 효력에 대해 오해하면서 신중하지 못하고 가벼운 마음으로 계약체결을 하는 경우가 많다. 거래실무상으로는, 당장 계약금으로도 지급할 돈 없이 사업진척상황에 따라 프로젝트파이낸싱(PF) 자금으로 부동산매매대금을 지급할 수밖에 없는 아파트사업시행자에게 부동산을 매매할 때 이런 계약형태가 자주 발생한다. 계약금이 없다고 쉽게 계약을 체결했지만 너무 싼 가격에 팔았다는 후회가 생기면서 계약에서 벗어나려고 하지만 해약이 쉽지 않아 당황하게 되는 것이다. 재삼 강조하지만, 금액이 적지 않은 계약, 더구나 일상적이지 않고 이례적인 계약일 경우에는 계약체결에 앞서 반드시 법률전문가와 상의할 필요가 있다. -이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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