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과장&이대리] "갑질 신고땐 사내 포상금…이제 '라면 상무'는 잊어주세요"
‘자동차, 선박, 엘리베이터부터 보온병, 스테이플러까지….’

눈에 띄진 않지만 우리 주변엔 포스코가 만든 제품, 철이 곳곳에 숨어 있다. 포스코 직원들은 ‘세계 최고 철강회사’에 근무한다는 자부심이 강하다. 하지만 ‘정치적 외풍에 약하다’ ‘군대문화가 남아 있다’ ‘갑질이 심하다’는 꼬리표도 달고 다닌다. 1968년 포항종합제철로 설립돼 2000년 민영화됐지만 이후에도 정부의 간섭이 끊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포스코에 다니는 김과장 이대리들의 이야기를 들어봤다.

대선이 두려워요

포스코 직원들은 대통령선거 때마다 속을 끓인다. 정권이 바뀔 때면 회사가 심한 외풍에 시달려온 탓이다. 이명박 정부나 박근혜 정부가 들어선 이후 이구택·정준양 전 포스코 회장은 모두 임기를 1년 이상 남겨 놓고 사퇴했다. 검찰 수사설이 흘러나오거나 국세청 세무조사가 이어진 뒤 물러난 모양새도 비슷했다. 지배적 대주주가 없다 보니 외풍에 속절없이 휘둘렸다. 최순실 국정농단 와중에도 포스코는 낙하산 인사, 광고 지원 등 각종 구설에 오르내렸다.

오는 5월 대통령선거를 앞두고 포스코의 한 그룹장(부장)은 “정치권에선 대선 후 포스코, KT, KB금융지주 주요 자리를 전리품처럼 챙기는 악습이 있었다”며 “민간 회사인 포스코가 왜 아직도 이런 대접을 받아야 하는지 모르겠다”고 토로했다. 갑작스럽게 회장이 교체되고 조직이 흔들리는 일이 잦으면서 내부적으로 “OOO는 △△△ 라인”이라는 식의 ‘줄서기 문화’까지 생겼다. 다만 요즘은 줄서기 문화도 많이 약해졌다는 평가가 나온다. 김모 대리는 “과장 이하 젊은 세대는 성격 좋고 일 잘하는 사람을 따른다”며 “출세를 위한 줄서기는 거의 없다”고 말했다.

외풍을 견디게 한 ‘현장의 힘’

수많은 정권이 스쳐가면서 포스코는 그때마다 홍역을 치렀다. 하지만 경쟁력은 녹슬지 않았다. 포스코는 글로벌 철강기업 경쟁력 평가에서 7년 연속 1위를 지키고 있다. 포스코 직원들은 “우리는 지구상에서 가장 마지막에 망할 철강기업”이라는 표현을 쓴다.

외풍에도 굳건한 비결은 ‘현장의 힘’이다. 송모 과장은 “신입사원 때 3개월가량 포항제철소와 광양제철소에서 현장교육을 받으면서 회사에 대한 생각이 바뀌었다”며 “일반인에겐 이상하게 들릴 수 있겠지만 철을 통해 나라에 보답한다는 ‘제철보국(製鐵報國)의 DNA’가 생겼다”고 말했다.

포항제철은 대일(對日)청구권 자금을 기반으로 세워졌다. 초창기 직원들은 아버지 어머니의 피와 눈물의 대가로 시작하는 사업인 만큼 제철소 건설에 실패하면 죽어야 한다는 ‘사즉생(死卽生)’의 각오로 임했다. 박모 대리도 “20~30년간 한 직장에 근무하며 혼을 담아 일하는 선배들의 말을 들으면 장인정신 이상의 것을 느낄 때가 있다”며 “할머니와 부모님 역시 포스코에 다니는 것만으로도 자랑스러워하셔서 남다른 사명감이 생긴다”고 말했다.

여성이 일하기 좋은 직장

남성적 이미지가 강한 철강업계지만 포스코엔 여성 임원만 10여명에 달한다. 신규 채용 시 여성 비율도 20% 이상이다. 서울 대치동 본사 부서 중엔 여직원이 절반을 넘는 곳도 있다. 여성이 늘면서 군대 같던 회사 분위기도 많이 부드러워졌다. 박모 차장은 “지난달 여직원들이 깜짝 생일파티를 해주고 고깔모자도 씌워줘 감동받았다”고 말했다. 여성인 이모 차장은 “육아휴직에 따른 불이익이 없고 사내 결혼이 많은 편”이라고 설명했다. 포스코는 출산 전후 휴가 90일 외에 육아휴직 기간을 최대 2년까지 보장하고 있다.

수도권 근무를 선호하는 젊은 포스코 직원에게 가장 큰 고민은 지방 근무다. 하지만 가족, 친구도 없는 포항·광양제철소에서 지내다 평생의 반려자를 만나기도 한다. 한 여직원은 “보통 다른 회사는 업무 분위기를 흐린다며 사내 결혼을 우려하지만 포스코는 지방 정착을 위해 사내 결혼을 장려하고 있다”며 “지방 근무로 노총각, 노처녀 신세를 벗어난 사례가 주변에 많다”고 전했다.

잊혀져가는 갑질

포스코는 ‘갑(甲)’의 대명사다. 1970년대부터 ‘산업의 쌀’로 여겨지는 강판을 독점 공급하다 보니 이를 사야 하는 수많은 업체는 항상 포스코의 눈치를 살폈다. 2010년 경쟁사 현대제철이 고로를 가동하기 전까지는 국내 유일의 고로 제철소를 보유하고 있었다. 자동차, 조선, 건설업계에서 포스코 제품을 받기 위한 경쟁이 치열했다. 당시 현대자동차가 신차에 맞는 새 자동차 강판을 요구해도 포스코 측이 “우리가 이미 개발해 놓은 것에 맞추라”고 했을 정도다. 철강업계 관계자는 “포항제철 시절 대리나 과장이 대기업의 강판 구매담당 임원들을 상대했다”며 “대리가 협력업체를 방문하면 ‘OOO 대리님 방문을 환영합니다’라는 현수막을 내걸었을 정도였다”고 귀띔했다.

2013년 포스코에너지 소속 상무가 비행기에서 “컵라면이 제대로 익지 않았다”며 여승무원을 폭행해 물의를 빚었다. 박모 대리는 당시를 회상하며 “어디 갈 때마다 ‘너네 회사 상무 어떻게 됐어?’ ‘포스코 상무는 평소에도 그런 식이니?’라는 질문이 쏟아졌다”며 “심지어 ‘그런 회사 다니느라고 힘들겠다’고 위로하는 친구도 있었다”고 말했다.

하지만 갑질도 점점 옛말이 되고 있다. 입사 3년차인 한모 대리는 “요즘은 철이 너무 흔해 코카콜라보다도 싼 시대에 살고 있다”며 “경쟁사가 많아 예전 같은 갑질은 불가능하다”고 말했다. 회사도 갑질 근절에 앞장서고 있다. 인사 청탁 등 임직원의 갑질을 신고하면 최대 1000만원까지 포상금을 준다.

우향우 정신은 옛말?

포스코를 대표하는 말 중 하나는 ‘우향우(右向右) 정신’이다. 고(故) 박태준 명예회장이 1968년 창설요원 39명으로 포항제철을 세울 때 “제철소 건설에 실패하면 우리 모두 우향우해 영일만에 빠져 죽자”고 한 데서 유래했다. 이후 수십년간 이 말은 포스코의 개척정신을 상징해왔다. 하지만 한편으론 군대식 문화를 대변하는 말이기도 했다.

그런 우향우 정신이 요즘은 퇴색하고 있다는 얘기도 나온다. 정모 대리는 “포스코 연봉이 철강업계 2위 현대제철보다 못하는 등 시대가 많이 바뀌었다”며 “우향우 정신을 고리타분한 얘기로 생각하는 젊은 직원도 있다”고 말했다. 실적에 따른 개인별 평가가 강조되는 것도 군대식 문화가 사라진 배경이다. 영업을 담당하는 김모 매니저는 “후배 실적에 ‘묻어가는’ 선배의 문화도 사라지고 있다”고 설명했다.

회식 문화도 바뀌고 있다. 포스코 계열사의 이모 대리는 “술을 잘 먹지 못해 걱정했는데, 최근 부서에서 ‘119’ 문화가 정착되면서 걱정이 사라졌다”고 했다. 119는 한(1)가지 술로 한(1) 장소에서 오후 9시까지만 먹는다는 의미의 ‘절주’ 캠페인이다.

안대규/장창민/정지은 기자 powerzanic@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