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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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6일 정부가 발표한 '국민 주거안정 실현 방안'의 후폭풍이 간단치 않다. 5년간 총 270만 가구의 주택을 공급해 시장을 안정시키겠다는 정부 구상이 뜻하지 않은 1기 신도시 정비 '공약 파기' 논란에 빛을 잃고 말았다.

요즘 주택거래에 냉기가 돌고 있어 주택공급 확대에 대한 관심이 예전보다 준 것은 사실이다. 그럼에도 평소 주택공급 활성화에 노력해야 한다는 차원에서 정부 발표를 평가해줄 만하다. 문제는 인화성이 만만치 않은 신도시 재건축 이슈를 건성건성 처리하다가 관련 지역민들의 호된 비판에 직면한 것이다.

분당 일산 등 1기 신도시 주민들은 올 연말엔 재건축 등 정비사업의 청사진이 나올 것으로 기대했다. 하지만 원희룡 국토교통부 장관은 16일 "올 하반기 연구용역을 거쳐 2024년까지 도시 재창조 수준의 1기 신도시 재정비 마스터플랜을 수립하겠다"고만 밝혀 화를 키웠다. 1기 신도시 정비 방안이 미뤄졌다는 평가가 바로 뒤따랐다. 해당 지역에선 "정부 의지가 없는 것 아니냐" "2년을 더 기다리란 얘기냐" "2024년 총선 매표용 아니냐"는 목소리가 득달같이 나왔다.

이에 대통령실은 물론, 윤석열 대통령까지 나서 "국민에게 제대로 설명되지 못했다"(지난 22일 국무회의)며 주무 장관을 질책했다고 한다. 1기 신도시 주민들 중심으로 반발이 확산되는 것을 서둘러 진화하려 할수록 씁쓸한 뒷맛만 더해진다. 첫 단추가 잘못 끼워지니 뭔가 계속 어긋나는 느낌이다.

◆옹색하기만 한 정책 설명

윤 대통령의 국무회의 발언은 정책 당국자가 공급자 마인드를 가져선 국민에게 정책을 전달하는 과정에서 신뢰를 얻기 어렵다는 올바른 지적이었다. 국민 시각에서 모든 사안을 보라고 강조한 것이다. 하지만 5년은 걸릴 신도시 마스터플랜 수립 등 작업을 2년 이내로 단축한 사실은 왜 제대로 전달하지 못했느냐고 꼬집은 점은 아쉬운 대목이다. 지난 대선을 거치면서 윤 대통령 본인부터 1기 신도시 정비를 새 정부 역점사업이자, 임기 초반 역량을 총결집해 속도를 낼 것처럼 강조해왔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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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기 신도시의 용적률은 169~226% 수준으로 결코 낮지 않다. 재건축을 통해 수익성을 크게 끌어올리기 힘들고, 그만큼 재건축 추진이 어렵다. 이런 현실에서 특별법 제정, 용적률 최대 500%까지 확대, 안전진단 규제 완화, 10만 가구 추가 공급 등을 공약한 게 바로 윤 대통령이다. 지난 4월 대통령직 인수위원회도 새 정부 출범과 동시에 1기 신도시 정비사업을 진행할 것처럼 움직였다. 그러니 해당 지역 주민들이 이번 정부 방안에 대해 실망을 넘어 배신감을 느끼는 건 당연하다.

인근에 조성되는 신도시에 비해 낙후된 주거환경, 상대적으로 낮은 집값에 따른 박탈감 등 주민들의 고충을 생각하면 새 정부가 여유 부릴 일이 아니었다. 1기 신도시는 작년부터 재건축 가능 연한인 준공 30년차를 맞고 있으며, 2026년이면 이 지역 아파트의 90%가 재건축 가능 연한을 채우게 된다. 이런 상황에서 "5년 걸릴 일을 단축시켰다"고 자찬하는 것은 옹색하기만 하다.

◆구상만 내보이는 굼뜬 정부

심교언 주택공급혁신위 민간대표는 1기 신도시 정비에 이처럼 시간이 걸리는 이유에 대해 "지역마다 사업 여건이 다르고, 3기 신도시 등 주변 택지에 미치는 영향 등을 고려해야 하기 때문"이라고 했다. 하지만 아무리 동일한 시기에 대단위로 건설된 신도시라 하더라도 지역별 상황에 맞게 시기를 신축적으로 조절하면서 정비사업을 진행할 수 있을 것이다. 상대적으로 뒤처지는 지역엔 충분히 양해를 구하고 다른 보상방안을 강구하면 될 일이다. 1기 신도시 가구수가 30만에 이르고 지리적으로 인접한 것도 아닌데, 이걸 왜 굳이 한꺼번에 정비하는 마스터플랜을 세워야 하는지 지역민들로선 납득하기 어렵다. 차라리 가까운 2기·3기 신도시들과의 연계성을 생각해야지, 동서남북으로 흩어진 1기 신도시의 마스터플랜을 세운다고 하니 공감을 못 얻는 것이다.

새 정부 출범 100일이 지났지만, 대략적인 구상만 내보이고 구체적 실행방안은 "뒤에 발표하겠다"는 식의 정책 발표가 계속되고 있다. 연금 개혁도 이제서야 국민연금 재정계산에 들어가고, 내년 하반기가 돼야 개혁 방안을 낼 수 있다고 한다. 신도시 정비나 연금 개혁이나 지난한 과제이긴 하다. 하지만 이런 정부 행태에 대해 "너무 굼뜨고 느긋하다"는 지적은 새겨들을 부분이다.

◆아마추어 수준의 정책 감각

윤 대통령이 강조했듯이, 국민 눈높이에서 관심을 모을 사안은 '270만 가구'보다 당장 내 주변의 개발과 정비일 것이다. 그런데 전체 46쪽에 걸친 '국민 주거안정 실현 방안'의 해설자료 가운데 1기 신도시 정비 건은 제목을 포함해 단 5줄만 나와 있다. 원 장관이 "대규모 정비 사업이어서 질서 있게 진행할 수 있도록 특별법과 마스터플랜 마련하겠다"고 설명했지만, '공약 파기'란 반응이 터져 나올 수밖에 없었다.

물론 투기수요 유입과 가격 상승 우려, 이주 대책, 인근 지역과의 형평성 등 고려할 사항이 하나둘이 아닐 것이다. 그런 사정을 좀 더 상세한 부연설명으로 붙였으면 이만큼 지역 반발이 컸을까 싶다. 정책 추진에도 운영의 묘를 살려가는 감각이 중요할 텐데, 지금의 모습은 아마추어리즘 그 자체다.

한번 탄착점을 놓친 정책은 뒷수습에 더 꼬일 위험이 크다. 최상목 대통령실 경제수석은 "1기 신도시 정비사업이 최대한 빠른 속도로 이뤄질 수 있도록 총력을 다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원 장관도 어제 "단 하루도 지체되는 일이 없도록 장관직을 걸고 약속한다"고 했다. 1기 신도시 주민들의 격앙된 반응을 잠재우기 위한 이런 다짐이 훗날 부담으로 돌아오지 않을까 걱정이다. 정부 정책에도 우선순위가 있고, 국가적 재원과 역량을 효율적으로 배분해야 할 책임이 정부에 있다. 그런데 이렇게 뒷수습에만 바쁜 아마추어리즘으로 무얼 하겠나 싶다.

장규호 논설위원 danielc@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