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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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항서 베트남 축구 국가대표 감독은 유니폼 왼쪽 가슴 높이에 그려진 붉은색 바탕의 노란 별을 힘차게 두드렸다. 필리핀 리잘 메모리얼 스타디움 한 켠을 가득 메운 베트남 응원단을 향한 그의 눈빛은 이렇게 말하려는 듯 했다. ‘박항서가 아니라 베트남이 우승을 만들었습니다’. 베트남 U-22 축구대표팀이 인도네시아를 꺾고, 2019 동남아시안게임(SEA) 남자 축구 결승에서 금메달을 딴 12월10일은 한·베트남 관계의 역사에서 길이 기억될 명장면이 될 게 자명하다. 민간 외교의 절정이라는 점에서다.

‘박항서 매직’은 10일 밤 늦도록 베트남 전역을 열광으로 물들였다. 금성홍기를 흔들며 요란하게 경적을 울리는 오토바이족들로 하노이 도심이 들끓었다. 필리핀에서도 그랬듯, 붉은 깃발의 행렬 속에서 간간히 순백의 대한민국 깃발이 눈에 띄었다. 하노이의 한인들도 이날 만큼은 삼삼오오 모여 축구 경기를 관람했다. 맥주집으로 집결한 베트남과 한국의 응원단들은 골이 터질 때마다 얼싸 안고 같이 기뻐했다. 베트남과 한국은 ‘박항서 매직’으로 다시 한번 정서적 유대를 확인했다.

베트남 사람들은 한국이 가진 것 중에서 가장 부러워하는 것을 꼽으라고 하면, 대부분 삼성과 축구를 얘기한다. 반도체로 세계를 재패한 삼성, 2002년 아시아 최초로 월드컵 4강 진출이라는 역사를 썼던 한국 축구는 베트남의 ‘위시 리스트’ 상단에 올라 있다. 한·일 월드컵 당시 하노이에선 ‘한국 축구선수들은 홍삼을 먹고 저렇게 잘 뛴다’는 소문이 돌면서 홍삼이 동이 났다고 전해진다. 거스 히딩크 감독과 함께 월드컵 4강 신화를 이뤘던 박항서 감독이 베트남 축구 사령탑을 맡으며 첫번째로 내린 처방이 ‘쌀국수 금지령’이었다는 점을 생각해보면, ‘홍삼 체력’에 관한 소문이 순전히 거짓은 아니었던 것 같다.

‘박항서 매직’이 반가운 이유는 베트남 사회에 ‘한국인 피로감’이 점점 고개를 들고 있는 찰나에 나왔기 때문이다. 한국의 베트남 투자 총액은 660억달러(누적)로 부동의 1위다. 2위인 일본(590억달러)과도 차이가 현격하다. 투자 규모가 큰 데다 한국인과 한국 기업들은 대부분 베트남 사람들과 부딪히며 직접 경영하는 것을 선호한다. 베트남 주요 기업에 지분 투자를 하거나, 대리인을 내세워 경영을 하는 일본과는 기질 면에서 다르다고 할 수 있다. 베트남에선 이 같은 한국인의 특성을 친밀함으로 바라보기도 하지만, 때론 서로 반감을 품을만한 일이 발생하곤 한다. 박항서 감독이 안겨준 베트남의 동남아올림픽 금메달은 당분간 서로의 앙금을 수면 아래로 가라앉힐 것이다.

박항서 감독 이전엔 삼성이 베트남 민간 외교의 선봉장 역할을 했다. 2007년 글로벌 금융위기가 닥치자 대부분의 한국 기업들은 베트남 투자를 철회했다. 공공 기관들도 약속을 헌신짝처럼 버렸다. 삼성전자가 2008년 베트남 북부 박닌성에서 대규모 휴대폰 공장을 가동하면서 한국은 그간의 ‘마이너스’를 단숨에 회복했다. 삼성이 하노이 인근의 북부 지방을 투자처로 택한 것도 획기적인 결정이었다. 그때까지만해도 우리 기업들은 대부분 경제 수도로 불리는 남부의 호찌민(옛 사이공)을 선호했다. 하노이를 비롯해 북부 투자에선 일본이 훨씬 앞서 있었다. 일본은 하노이의 정치 권력이 핵심임을 간파했다. 이 같은 열세는 삼성의 투자로 단번에 뒤집어졌다. 삼성전자는 협력사 등 연관 업체까지 합쳐 연간 약 100만명을 고용한다.

베트남 전쟁의 상흔이 아직 남아 있음에도 한·베트남 관계가 오늘날처럼 비약적인 관계로 발전한 데엔 박항서 감독과 삼성 등 민간 외교단이 베트남에 뿌리 내린 친한 정서 덕분이다. 한국 기업들의 베트남 진출은 거의 쇄도 수준이다. 하지만 한국의 베트남 투자와 진출이 얼마나 전략적인가에 관해선 많은 전문가들이 의문을 표시한다. 정부가 신남방정책을 내세우고는 있지만, 표어에 그칠 뿐 실질적인 무언가가 없다는 게 중론이다. 최근 화두로 떠오르고 있는 ‘스마트 시티’ 수출만해도 ‘어떻게’와 관련해선 이렇다할 방안이 나오지 않고 있다. 스마트 시티에 관한 개념 합의조차 돼 있지 않다. 정부는 가만히 있는 게 도와주는 것이라는 말이 있다고는 하지만, 해외 진출과 관련해선 정부의 역할이 클 수밖에 없다. 민간 외교가 이룬 성과를 극대화하기 위해서라도 신남방정책이 좀 더 정교하게 집행됐으면 하는 바람이다.

박동휘 하노이 특파원 donghuip@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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