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29일(현지시간) 남북한 정상회담 날짜가 확정된 지 하루 만에 ‘한·미 자유무역협정(FTA)과 북·미 대화’ 연계 카드를 들고나오면서 한국 정부로서는 큰 부담을 안게 됐다. 청와대는 30일 신중한 반응을 보이면서 향후 파장을 예의주시하고 있다. 전문가들은 트럼프 행정부가 한국 정부의 대북 압박 전선 이탈을 막기 위해 한·미 FTA를 지렛대로 삼은 것이라고 분석했다.

◆美 언론 “한국에 대한 압박”

트럼프 대통령은 29일 오하이오주 리치필드에서 한 연설에서 “한·미 FTA 개정 협상 서명을 북한 핵 협상 타결 이후로 미룰 수 있다”고 말했다. 전날 트위터를 통해 한·미 FTA 협상에 대해 “훌륭한 협상”이라고 한 지 하루 만에 말을 바꾼 것이다.

워싱턴 정가에서는 한국 정부에 미국과 같은 강력한 대북 비핵화 원칙을 고수할 것을 강력히 압박한 것이라는 분석을 내놓고 있다. 뉴욕타임스(NYT)는 “문재인 대통령이 남북 정상회담에서 강력한 비핵화 입장을 유지하도록 묶어두려는 움직임일 수 있다”고 해석했다. 북한에 비핵화를 압박하는 과정에서 자칫 발생할 수 있는 한·미 간 균열을 막기 위해 한·미 FTA 카드를 살려둔 것이란 해석이다.

월스트리트저널(WSJ)도 북·미 정상회담에서 미국의 목표는 엄격한 검증을 전제로 한 ‘완전한 비핵화’라는 점을 지적하면서 “트럼프 대통령이 북한을 압박하기 위해 한·미 FTA를 늦추겠다고 언급했다”고 보도했다.

AP통신은 미국이 한·미 FTA에서 더 유리한 ‘무역조건’을 얻어내려는 것이라고 보도했다. 오하이오주 연설이 미 인프라 투자 활성화를 주제로 한 것이었다는 점에서다. 라즈 샤 백악관 부대변인은 “한·미는 원칙적으로 FTA 합의에 도달했다”며 “마무리하는 시기는 트럼프 대통령에게 달려 있다”고 밝혔다. 트럼프 대통령의 발언은 백악관 관계자들도 예상하지 못한 것으로 알려졌다.

◆당혹스러운 靑 “지켜보겠다”

청와대는 트럼프 대통령의 돌출 발언에 곤혹스러움을 감추지 못했다. 청와대 관계자는 트럼프 대통령 발언에 대한 입장을 묻는 기자들의 질문에 “지켜보겠다”며 말을 아꼈다. 정부 역시 난감해하는 모습이 역력했다. 한 외교부 당국자는 “트럼프 대통령 발언의 진의를 파악 중”이라고만 했다.

트럼프 대통령이 안보와 통상 문제를 연계하겠다는 의지를 노골적으로 드러내면서 문 대통령의 안보·통상 분리 방침은 차질이 불가피해졌다는 관측이 나온다. 문 대통령은 지난 2월 수석·보좌관회의에서 미국의 통상 압력에 적극 대응하라고 지시하며 안보와 통상 문제는 별개라는 사실을 분명히 했다. 한 외교 소식통은 30일 통화에서 “문 대통령의 ‘한반도 운전자론’에 중대한 도전 요인이 등장한 것”이라며 “문 대통령이 안보와 함께 경제 문제도 같이 풀어갈 수밖에 없게 돼 대응책 마련이 시급하다”고 했다.

전문가들은 한국 정부가 북한 비핵화를 위해 더 적극적인 역할을 해야 한다는 트럼프 대통령의 경고성 메시지라고 분석했다. 신범철 국립외교원 교수는 “비핵화 방법을 놓고 북·미 간 의견차가 큰 상황”이라며 “미국은 한국 정부가 단순 중재자 역할에 머물러서는 안 되며 북한을 적극 견인해 완전한 핵폐기로 이끌어야 한다는 점을 강조한 발언으로 보인다”고 평가했다.

고유환 동국대 북한학과 교수도 “우리가 잘하면 인센티브를 주고, 못하면 경제 분야에서 추가 관세를 부과하겠다는 식의 압박으로 보인다”며 “전형적인 ‘트럼프식 협상전술’”이라고 지적했다.

김채연·조미현 기자/ 뉴욕=김현석 특파원 why29@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