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경영 20년…삼성 DNA를 바꾸다] "이건희 회장 취임 땐 '관리의 삼성' 앞날 걱정했는데…더 큰 관리로 도약"
“이건희 회장이 취임할 때만 해도 삼성의 미래를 걱정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았습니다.”

삼성그룹 비서실 출신인 천주욱 창의력연구소장(65)은 지난 11일 ‘런 삼성 포럼’에서 이 회장이 그룹을 맡게 된 1987년을 이렇게 기억했다. 천 소장은 1975년 삼성그룹에 입사해 1997년까지 삼성에 몸담았다. 이 회장이 취임한 때는 삼성물산 기획부장으로 일했다.

당시 이 회장에 대한 우려가 나온 이유는 이랬다. 우선 이 회장이 은둔의 경영자였기 때문이란 게 천 소장의 설명이다. 이 회장은 고(故) 이병철 삼성 창업 회장 밑에서 경영 수업을 받으면서 일절 말을 하지 않았다. 자기 생각을 철저히 숨겼다. 가끔 해외 법인에 가서 직원들을 격려하는 게 전부였다고 한다.

그러다 회장직에 오른 1987년부터 말을 본격적으로 하기 시작했다. 천 소장은 “한 번 말문이 트이자 무섭게 쏟아냈다”고 표현했다.

그룹에 있던 참모들은 봇물 터지듯 나온 이 회장 말들에서 혼란스러워했다. 이병철 회장 때와 달라도 너무 달라서였다.

우선 숫자 중심 철학이 바뀌었다. 창업 회장은 ‘합리 추구’라는 경영이념을 표방하며 구체적인 수치를 중시했다. “금성사와 냉장고 판매량 차이가 얼마냐”라거나 “전년 동기 대비 매출이 얼마 늘었나”라고 묻는 식이었다. 심지어 공항에서 “비행기 바퀴 무게가 얼마냐”고 질문하는가 하면 에버랜드를 방문해선 농반진반으로 “잉어 한 마리 원가가 얼마지”라고 물을 정도였다. 덕분에 숫자에 강한 사람이 잘나갔고 재무나 관리 부서 임원들이 승승장구했다.

이 회장은 달랐다. “올해 매출과 이익 목표를 달성했다”고 보고하면 “연말에 물량 밀어내기해서 숫자를 조작한 것 아니냐”고 의심했다. 매출은 선대 회장보다 덜 중요하게 여겼지만 특정 부문에선 한 술 더 떴다. 불량률이 그랬다. 이 회장은 ‘불량률을 획기적으로 줄였다’는 내용을 듣자마자 “그 따위 말 필요없다. 하나도 없어야 한다”고 소리쳤다.

1993년 독일 프랑크푸르트에서 신경영을 선언한 이후 ‘질(質) 경영’과 함께 ‘국제화’를 외치며 이 회장의 눈높이는 더 높아졌다. 그는 삼성보다 가전 사업을 먼저 시작한 금성사와 격차를 줄였다는 보고를 받고는 “나는 금성사에 관심도 없다. 우리 경쟁자는 소니나 인텔”이라고 강조했다.

이 회장은 “가만히 있어도 되니까 제발 뒷다리 잡지 말라”는 말도 자주 했다. 재무를 비롯한 ‘관리’ 쪽 사람들의 힘을 빼기 위한 의도였다고 천 소장은 전했다.

인사 관행도 바꿨다. 선대 회장 땐 현장에서 잘나가던 사람들을 그룹으로 불러들였다면 이 회장은 반대로 했다. 유능한 관리 인력을 현장에 전진배치했다.

대화 방식 역시 달라졌다. 선대 회장은 똑 떨어지는 숫자를 좋아했고 답변도 길게 하면 싫어했다. 말이 길어지면 “김군, 왜 이렇게 말이 많나”라고 핀잔을 주기도 했다고 한다.

반면 이 회장은 숫자로 짧게 답하는 것보다 두세 시간씩 길게 얘기하는 걸 더 좋아했다. 절대 숫자가 답변으로 나올 수 없는 주관식 질문을 자주 했다. 천 소장은 “자주 달마대사식 선문답이 오갔다”고 회상했다.

이런 대화 속에서 이 회장은 큰 그림을 그렸다. 숫자로 된 목표치를 얘기하기보다 가야 할 방향만 제시했다. 구체적인 전략은 그룹 참모들이 다 만들어냈다. 이 회장이 “창조경영을 하자”고 하면 회장 분신인 미래전략실에서 온갖 아이디어를 만들어내는 식이다.

그렇다고 이 회장이 기존 ‘관리의 삼성’을 완전히 버린 건 아니었다. 천 소장은 “관리 인력들에게 본인이 제시한 가이드라인 안에서 궁리하게 했다”고 말했다. 그는 “삼성이 지금처럼 발전하게 된 건 이 회장을 중심으로 삼성이 더 큰 관리로 넘어갔기 때문인 것 같다”고 덧붙였다.

정인설/배석준 기자 surisuri@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