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찰이 대선자금 수사와 관련, 7개 기업의 핵심 관련자 10여명을 출국금지시키는 등 비자금 수사가 본격화하면서 재계가 심리적 공황 상태에 빠져들고 있다. 특히 검찰 수사의 칼날이 그룹의 심장부인 구조조정본부를 향하고 있는 데다 총수들 역시 해외출장 등 대외활동을 당분간 보류할 움직임이어서 관련 그룹 수뇌부의 업무가 사실상 마비되고 있다. 13일 재계에 따르면 최근 검찰의 수사 방향이 당초 공언했던 것과 달리 정당이 아닌 기업 쪽으로 몰리면서 '표적 사정설'이 난무하고 있다. 게다가 대선자금과 직접 관련이 없는 과거 의혹사건도 들춰내겠다는 '위협'까지 들먹거리자 해당 기업들은 극도의 긴장에 싸이고 있다. 기업들은 노무현 대통령의 '선(先) 고해성사-후(後) 사면' 안과 '수사에 협조하지 않는 기업들엔 불이익을 주겠다'는 검찰 수사원칙 사이에서 도무지 갈피를 잡지 못하고 있다. 이에 따라 주요 경영진들은 대부분 검찰의 수사 추이는 물론 △청와대 입장 △정치권 동향 △시민단체 움직임 △여론의 향배 등을 저울질하는데 총동원돼 있지만 들리는 것은 흉흉한 소문들 뿐이다. 급기야 지난 12일 밤에는 이건희 삼성 회장의 중병설이 인터넷 등에 퍼지면서 청와대까지 나서 경위를 파악하는 소동이 벌어지기도 했다. 이 회장은 13일 저녁 신라호텔에서 열린 삼성 휴대폰 초일류 전략회의에 건강한 모습으로 나타나 중병설을 불식시켰다. 한 관계자는 "어수선한 세월에 뜬금없는 소문까지 난무하고 있다"며 씁쓸해 했다. 기업들의 영업활동에 매우 중요한 비중을 차지하는 행사도 극도로 위축된 분위기에서 치러지고 있다. 12일 서울 그랜드힐튼호텔에서 열린 현대자동차의 신형 에쿠스 발표 행사는 전현찬 부사장(국내영업본부장)이 행사를 주관했다. 현대차의 대표적 고급 세단 발표장에 사장급 이상의 경영진이 모조리 빠진 것은 이례적인 일. 이들의 불참 배경은 정확하게 알려지지 않고 있으나 대선자금과 관련된 기자들의 질문을 부담스러워했기 때문이라는 추측이 설득력을 얻고 있다. 지난 12일 신라호텔에서 열린 전경련 회장단 간담회에도 참석자는 6명뿐이었다. 전임 회장인 손길승 SK 회장과 회장대행에 추대된 강신호 동아제약 회장, 현명관 전경련 부회장 등 반드시 나와야 하는 사람들을 제외하면 3명만 얼굴을 내민 셈이다. 12일 과천 정부 종합청사에서 열린 공정거래위원회 '시장개혁 로드맵' 설명회에도 당초 초청대상이었던 구조조정본부장들은 한 사람도 나타나지 않았다. 이 회의에 참석했던 LG그룹 관계자는 "실무자선이지만 충분히 의견을 교환한 만큼 본부장들이 모일 필요가 있겠느냐"고 반문했다. 하지만 사실상 그룹의 2인자 격인 본부장급 인사들에게 검찰의 수사가 집중되고 있는 상황에서 이들 본부장이 앞으로 제 역할을 해낼 것으로 보는 이는 많지 않다. 재계 관계자는 "그룹 총수나 본부장들의 발목이 묶일 경우 일상적인 업무는 가능할지 모르겠지만 굵직한 신규 투자나 해외사업 확대 등의 업무는 차질이 불가피할 것"이라고 밝혔다. 조일훈 기자 jih@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