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 홍상화

1979년 한여름이 막 시작되는 8월,박정희의 유신정권이 종말을 고하기 수개월 전 어느 날 새벽,통금이 막 해제될 시간에 최형식은 황무석이 사는 아파트의 초인종 버튼을 눌렀다.

황무석은 아직 잠이 덜 깬 상태에서 현관 문을 열었다.

피투성이 얼굴을 수건으로 누르고 서 있는 최형식을 본 순간 황무석은 깜짝 놀라 그를 문 안으로 끌어들였다.

최형식이 얼굴을 덮은 수건을 떼었다.

금세 피가 철철 흘러나왔다.

"큰일났구나. 빨리 병원으로 가자"

"안 됩니다. 약방에 가서 약이나 좀 사주세요..어디 갈 데가 있어야지요"

"무슨 말을 해? 잔말 말고 빨리 따라와"

신을 신고 문 밖으로 나서는 황무석을 최형식은 따라갔다.

최형식이 병원 응급실에 들어가 진찰을 받은 뒤 곧 황무석이 왔다.

황무석은 일단 출혈을 막기 위해 상처를 꿰매야 하니 상처가 아문 후 성형수술을 하기로 했다는 것이었다.

한 시간 반쯤 지나 마취가 깬 최형식이 입원실로 옮겨졌다.

당장 퇴원하겠다는 최형식을 황무석이 다시 야단을 쳐서 침대에 눕게 했다.

"그래 무슨 일이 있었어?"

황무석이 물었다.

최형식이 머뭇거리다가 자초지종을 얘기하기 시작했다.

"제 여자가요.. 올 가을에 결혼할 여자예요. 그 여자가 가발공장에서 일하는데요. 회사가 갑자기 아무 얘기도 없이 폐업을 한다고 해서 공장에 모여 농성을 했어요.

그러다가 이틀 전 야당 당사를 찾아가 거기서 농성을 벌이고 있었어요.

어제 저녁에 제가 걱정도 되고 해서 그리로 갔는데..그런데 경찰 놈들이 여자들을 농성장에서 개 끌어내듯이 끌어내고 있었어요.

그 앞에서 한참을 서성거렸어요.

결국 그 여자도 끌려나왔어요.

미치는 것 같았지만 꾹 참았어요.

그때 야당 당수가,그곳에 있는 경찰 책임자 같던데,그놈의 뺨을 갈겼어요.

그래서 저도 그 여자들을 데려가는 경찰한테 덤벼들었어요"

"그래,경찰한테 이렇게 얻어맞았단 말이야?"

"예,곤봉으로 얻어맞았어요.

그리고 까무라쳤어요.

좀 있다 나를 차에 실으려 해서 도망쳤지요"

"그만한 게 다행이다.

까딱했으면 송장이 될 뻔했다"

"송장 됐으면 저도 좋을 뻔했어요"

"왜,그게 무슨 소리야?"

"이제는 송장보다 더 지독하게 싸워볼 거예요"

"누구하고 싸운단 말이야?"

"누구하고라도요. 돈 있고 빽 있는 놈이면 누구하고라도 한번 붙어보겠어요"

회상이 끝났을 때 최형식은 1979년 그 사건 이후 자신의 인생경로를 되돌아보았다.

권력과 재력에 대항한 투쟁,법으로부터의 끊임없는 추적,지루한 법정투쟁과 옥중생활,그리고 수년 전 이승을 떠날 때까지 아내와의 행복했던 생활..

그러한 인생은 결코 외롭거나 비열한 인생은 아니었다고 자부할 만했다.

은밀하게 가슴속에 품은 이데올로기가 동료애를 키워 그를 외롭게 내버려두지 않았고,이데올로기는 항상 그의 가슴에 향기로운 우월감을 심어주었다.

그의 과거는 이데올로기를 먹고살았던 시절이라고 할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