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마을] 나물 캐듯 정보 '캐는' 한국인…채집시대 DNA 간직
‘까꿍이’ ‘쑥쑥이’ ‘무럭이’ 같은 배냇이름, 즉 태명은 언제부터 지어 부르기 시작했을까. 강희숙 조선대 교수의 논문에 따르면 태명은 2001~2007년에 한국에서 새로운 유행으로 자리잡았다고 한다. 세계적으로 태명을 지어 부르기 시작한 건 한국이 최초다. 외국에선 태아를 ‘It’ 또는 ‘Baby’ 정도로 표현한다. 한국인은 태아에게도 이름을 부여하고 존재를 인정한다. 그럼으로써 산모는 뱃속 아이와 대화하고 소통하는 관계, 즉 모자 상호작용을 하게 된다고 생각한다.

한국에서는 나이를 셀 때도 이런 생각이 중요하게 작용한다. 서양에선 엄마 뱃속에 있는 시간을 아이의 나이로 치지 않는다. 한국에서는 엄마 뱃속에 있을 때부터 한 살이다. 태아는 스스로 태반을 생성하고 호르몬을 분비하고 필터로 걸러내고 뱃속에서 나갈 시기를 결정한다. 누가 가르친 게 아니다. 이렇게 우리는 태생기에 있는 태아를 거대한 생명 질서의 주인공으로 여긴다. 또 이 생명질서를 지금 문명과 연결하며 산다. 서양사회와 구분되는 지점이다.

[책마을] 나물 캐듯 정보 '캐는' 한국인…채집시대 DNA 간직
한국 문화계의 거목이자 우리 시대 이야기꾼인 이어령 전 이화여대 교수(사진)가 펴낸 《너 어디에서 왔니》는 태명 이야기로 시작한다. 책의 부제는 ‘한국인 이야기-탄생’. 이 전 교수가 2009년부터 원고를 쓰기 시작한 ‘한국인 이야기’ 시리즈의 첫 권으로 한국인의 ‘탄생’ 이야기다.

저자는 인간의 진실과 생명의 본질에 대한 그동안의 생각을 풀어냈다. 흥미로운 점은 저자의 생각을 이야기로 쭉 정리해 보여준 이전 책들과 달리 온갖 텍스트와 인터넷에 떠도는 집단 지성을 찾아 재구성했다는 것이다. 그래서 저자 스스로 이 책을 검색, 사색, 탐색의 ‘3색’이 통합된 거대한 지적 그물망이라고 설명했다.

아이를 안고 있는 여인 전신상을 그린 ‘운낭자상’.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아이를 안고 있는 여인 전신상을 그린 ‘운낭자상’.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시오노 나나미의 《로마인 이야기》 시리즈가 로마 황제와 영웅, 역사적 인물 이야기라면 ‘한국인 이야기’ 시리즈는 역사에 등장하지 않는 저잣거리, 술청, 사랑방에서나 들을 수 있었던 너와 나, 우리의 사소한 이야기를 끄집어낸다. 저자는 “서양의 아라비안나이트처럼 밤마다 끝도 없이 이어지는 것은 같지만 어느 꼬부랑 할머니의 자장가 같은 평범한 이야기 속엔 한국인의 집단기억과 문화적 원형이 숨어 있다”고 강조한다.

이 전 교수는 한국인 문화유전자의 암호를 하나씩 풀어간다. 먼저 인류문명의 물결을 농경시대부터 계산했던 미래학자 앨빈 토플러의 주장을 정면으로 반박한다. 인간문화는 문명의 텃밭인 수렵·채집 시대부터 계산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는 “대우주의 생명질서가 녹아 있고 인간 유전자와 두뇌 등 모든 생장을 위한 조건은 수렵·채집 시대 때 형성된 그대로”라고 주장한다. 그러면서 정보 문명의 최첨단을 달리는 지금 이 시대도 한국인은 채집 문화 흔적을 그대로 지닌 집단이라고 말한다. 대표적인 사례가 정보화 시대 속에서도 이른바 ‘나물 문화’를 유지하고 있는 것이다. 그는 “정보화 시대 선도 국가인 한국에선 여전히 수많은 정보조차 나물처럼 ‘캔다’고 말한다”며 “호미로 나물을 캐던 풍습이 유전자 속에 잠재해 있는 것”이라고 말한다.

저자는 이런 정보화 시대 다음으로 ‘생명화 시대’가 온다고 주장한다. 그러면서 우리가 자연과 단절된 문화 문명으로 사느냐, 대우주의 생명질서를 바탕으로 오늘의 문명과 연결하며 사느냐란 선택의 기로에 서 있다고 말한다. 그는 “인공지능(AI)이 산업시대와 연결된 재앙이지만 생명화 시대 기술로 사용되면 달라진다”며 “한국의 문화 유전자는 생명화 시대를 이끌 힘이 있다”고 자신한다.

저자는 인류 문명이 태동한 채집 시대부터 이어져온 문화유전자가 여전히 한국 생활문화 속에 고스란히 남아 있다는 점을 여러 사례로 설명한다. 한국은 서양과 달리 아기가 태어나자마자 재우는 요람을 사용하지 않은 유일한 나라였다. 포대기로 업어 키우니 애초 ‘분리불안’ 같은 말을 모르고 살았다. 새 생명의 탄생을 돕고 ‘애프터서비스’까지 하는 삼신할머니라는 ‘생명의 여신’도 갖고 있다.

저자는 “이렇게 다양한 생명 자본을 유전자 깊이 간직했던 한국인만의 문화가 한류는 물론이고 민주주의와 경제성장을 이뤄낸 원동력”이라고 강조한다. 책은 한국인 문화유전자의 첫 태동을 긴 여정으로 담아내며 한국 문화 속에 담긴 원초적 생명력의 의미를 파헤친다. 그가 펼쳐내는 ‘한국인 이야기’는 한국인을 더욱 깊게 들여다보고 한국인으로 태어나 한국인으로 살아가는 우리를 스스로 긍정하게 해준다.

은정진 기자 silver@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