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로작가 오세열 화백(72)의 작품 ‘무제’(그림)에서는 어두컴컴한 밤에 네 사람이 대화를 나누고 있다. 작가의 붓터치는 칠판에 백묵으로 낙서를 한 듯 거칠고 자유분방하다. 선이 삐뚤삐뚤하고 색도 거칠게 입혀 얼핏 봐서는 어린 아이 그림을 보는 것 같다. 그림 속 인물들의 눈은 장난기를 가득 머금고 있고 키가 작은 걸로 봤을 때 아이들인 듯 보인다. 달밤에 머리를 맞대고 동네 어른들을 골탕먹일 짖궂은 장난을 궁리 중인 것 같다. 오 화백은 “동심의 눈으로 대상을 바라보고 표현했다”고 말했다.

오 화백의 인물화 32점을 전시하는 개인전 ‘무구(無垢)한 눈’이 서울 소격동 학고재갤러리에서 다음달 17일까지 열리고 있다. 이번에 전시된 작품들은 일반적인 인물화처럼 실제 모델을 보고 그린 게 아니라 전부 작가가 상상해서 그린 것들이다. 인물들은 단순화·추상화돼 있고 그림 여기저기에 단추 등 각종 오브제(미술적 표현에 사용되는 물체)도 붙어 있다. 의도적으로 서투른 듯 그려진 인물과 장난스럽게 배치된 오브제는 파울 클레, 파블로 피카소, 장 뒤뷔페 등 20세기 미술사의 거장이 유행시켰던 ‘아동화로 돌아가라’라는 표어를 연상시킨다. 선입견을 떨치고 순수한 시선으로 대상을 그리겠다는 작가의 의도를 읽을 수 있다.

각 작품에 인물이 등장하는 만큼 관객이 상상력을 동원해 스토리를 입혀보며 관람하는 재미가 있다. 작품들은 관객이 특정 스토리를 상상하도록 강요하지 않는다. 두 사람이 서로 마주보고 있는 작품은 둘이 눈싸움을 하는 것으로 볼 수도, 사랑을 나누고 있는 것으로 볼 수도 있다. 어린아이 같은 붓터치와 상상력으로 그렸지만 작품의 구도는 밀도 있게 짜여 있다. 밝은 느낌의 그림에서는 빈 공간에 분홍색 꽃을 그려넣었다. 감옥 안이 배경인 어두운 느낌의 그림에서는 빈 공간을 어두컴컴하게 비워 놓아 휑한 느낌이 들도록 했다. 오 화백의 1970년대 작품부터 올해 작품까지가 모두 있어 작가의 예술세계가 어떻게 변해왔는지 시계열적으로 살펴보는 재미도 있다.

오 화백은 “그림에 심오한 의미를 담기보다 즐겁게 그린다는 생각으로 작업을 했다”며 “관람객도 가볍게 즐긴다는 생각으로 전시회를 둘러봤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양병훈 기자 hun@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