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 제조업체의 재고가 3개월 만에 970억달러(약 125조원) 늘어나며 10년 만에 최대 규모를 기록했다. 기업들은 남아도는 재고를 정리하기 위해 생산을 줄일 가능성이 높다. 이 경우 세계 경제가 침체에 빠질 수 있다는 우려가 나온다.

29일 니혼게이자이신문에 따르면 올해 3월 말 세계 2349개 상장 제조업체의 재고 규모는 1조8696억달러로 작년 말보다 970억달러 늘었다. 재고 규모와 증가액 모두 10년 만의 최대치다. 재고 증가율은 5.5%로 미·중 무역마찰이 본격화한 2018년 3월 말(6.1%) 후 가장 큰 폭이다.

전자·車·기계 재고 급증

국제 상품 가격이 급등하자 기업들이 일찌감치 원자재 확보에 나서면서 재고가 늘었다는 분석이다. 세계적인 물류 정체 여파로 제때 출하하지 못한 완제품 재고도 급증했다.

세계 제조업 재고 산더미…경기 침체 경고음
12개 제조업종 모두 재고가 늘었다. 특히 전자, 자동차, 기계 등 3개 업종에서 증가한 재고가 전체의 61%를 차지했다. 전자 업종의 재고는 4570억달러로 1분기 만에 267억달러(6%) 증가했다. 자동차 업종의 재고는 2730억달러로 148억달러(6%) 늘었다.

개별 기업 가운데는 삼성전자의 재고가 가장 많이 늘었다. 1분기 말 삼성전자의 재고 규모는 392억달러로 작년 말보다 44억달러(13%) 증가했다. 공급망 혼란에 대비해 원재료를 미리 확보한 결과로 분석된다.

메르세데스벤츠의 재고도 9% 늘었다. 핵심 부품이 부족해 미완성 자동차 재고가 증가한 데다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이후 완성차 출하도 부진한 결과라는 설명이다. 해럴드 윌헬름 메르세데스벤츠 최고재무책임자(CFO)는 “지정학적인 제약이 언제 해소될지는 예측하기 어렵다”고 말했다.

공급이 남아돌면서 재고도 늘어나고 있다. 급속한 물가 상승의 여파로 스마트폰과 PC 등 전자업종의 수요가 이미 정체상태에 접어들었다는 분석이다. 대만 PC업체인 에이수스는 매출이 9% 줄어든 반면 재고는 18% 늘었다. 전자부품 등 원재료 조달 규모를 늘린 데다 우크라이나 위기 이후 유럽 시장의 부진으로 완제품 재고도 증가했다. 닉 우 에이수스 CFO는 “당분간 현재의 재고 수준을 유지할 것”이라고 말했다.

포드모터스의 재고(146억달러)는 25년 만에 최대 규모로 불어난 반면 1분기 매출은 8% 줄었다. 부품 조달 문제로 제조가 중단된 차량이 5만3000대에 달했다. 완성차 재고도 36% 늘었다. 존 롤러 포드 CFO는 “섀시 등의 부품을 확보하지 못하고 있다”고 했다.

재고 조정 따른 경기 침체 우려

재고가 며칠 만에 모두 소진되는지를 나타내는 재고회전일수는 81.1일로 작년 4분기보다 3.6일 늘었다. 코로나19의 세계적인 확산으로 재고가 급격히 늘었던 2020년 1~3분기를 제외하면 2012년 이후 소진 기간이 가장 길다.

전문가들은 기업이 과잉재고 해소를 위해 생산량 조절에 나서면서 글로벌 경기가 침체 국면에 빠질 가능성을 우려했다. 미국·유럽연합(EU)의 6월 구매관리자지수(PMI)는 50 수준까지 떨어졌다. 중국의 PMI 역시 3개월 연속 50을 밑돌았다. PMI가 50 미만이면 기업이 경기 침체를 예상한다는 뜻이다. 1분기 세계 제조업체의 매출은 작년 4분기보다 3% 줄었다.

다만 업황 악화로 재고가 늘지만 제조업체들의 자금력은 탄탄한 것으로 나타났다. 지난 3월 말 글로벌 제조업계가 보유한 유동성 자금(1년 이내에 현금화할 수 있는 자산)은 2조1738억달러였다. 2.3개월치 매출에 해당한다. 유동성 자금이 2개월치 매출 이상이면 자금상황이 안정적인 것으로 평가된다.

3월 말 삼성전자가 보유한 유동성 자금은 1000억달러로 매출의 5개월치에 달했다. 도요타자동차 역시 2.3개월치 매출인 6조엔(약 57조원)의 자금을 확보한 것으로 조사됐다.

도쿄=정영효 특파원 hugh@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