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러스트=전희성 기자 lenny80@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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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라, 마시모두띠, 스트라디바리우스 등을 거느린 세계 최대 패션그룹 인디텍스의 파블로 이슬라 최고경영자(CEO)는 제조·직매형 의류(SPA) 혁명을 완성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이슬라 CEO는 창업자 아만시오 오르테가의 ‘패스트 패션’ 시스템을 한 단계 업그레이드하고 판매망을 세계로 확대했다.

지난해와 올해 2년 연속으로 경영 전문지 하버드 비즈니스 리뷰(HBR)가 선정한 세계 최고 경영자로 뽑히기도 했다. HBR은 이슬라 CEO가 지속가능한 경영을 추구하면서 자라 등 여러 브랜드를 폭발적으로 성장시켰다고 평가했다. 인디텍스 매출은 이슬라 CEO가 취임한 2005년 67억4100만유로(약 8조6000억원)에서 지난해 253억4000만유로(약 33조3552억원)로 네 배 가까이 증가했다. 매장 수는 3000여 곳에서 7400여 곳으로 늘었다.

유럽의 자라에서 세계 최대 자라로

인디텍스의 역사는 창업자 오르테가가 1963년 스페인 북서부 라코루냐에 의류 공장을 세우고 1975년 아내와 함께 옷가게를 열면서 시작됐다. 이 옷가게 이름이 자라였다. 창업 초기부터 유행을 발 빠르게 좇아가면서 가격은 낮은 옷을 만드는 데 집중했다. 세련된 디자인과 싼 가격이 부각되면서 자라의 옷은 점점 인기를 더해 갔다. 오르테가는 전산 전문가 호세 마리아 카스테야노를 고용해 유통 시스템을 구축하고, 축구장 90개를 합친 넓이의 대형 물류기지를 세웠다.

오르테가는 2005년 이슬라 CEO를 영입했다. 검사 출신인 그는 포풀라르은행(현 산탄데르은행) 법률팀 부장을 거쳐 담배회사 알타디스 회장에 오르는 등 기업에서도 능력을 인정받았다. 창업자의 선택은 훌륭했다. 이슬라 CEO는 신제품 개발과 생산 효율 향상에 집중 투자했다. 그 결과 2주에 한 번씩이었던 신제품 출시 주기가 주 2~3회로 단축됐다.

해외 시장으로도 보폭을 넓혔다. 중국, 러시아, 폴란드, 멕시코 등 전 세계에 진출해 덩치를 키우면서도 시스템을 안정적으로 유지했다. 인디텍스는 2010년 미국 갭(GAP)을 제치고 세계 1위(매출 기준) 의류업체에 등극했다. 오르테가는 2011년 이슬라 CEO에게 전권을 넘기고 은퇴했다. 이슬라 CEO는 “인디텍스가 12년 연속 성장할 수 있었던 비결은 구매와 생산이 본사 근처에서 이뤄지는 사업 모델, 매장 직원이 주도하는 생산 구조, 수평적 조직문화”라고 말했다.

파블로 이슬라, 자라·마시모두띠 등 제조·직매형 의류(SPA) 혁명 주도…5년 만에 GAP 제치고 세계 1위 의류社로
매장과 본사 간 실시간 소통이 핵심

자라가 등장하기 전 의류 회사들은 1년에 서너 차례씩 계절별로 신상품을 선보였다. 또 제품의 60~80%는 계절에 앞서 미리 생산했다. 자라는 이런 공식을 뒤엎고, 15~20%만 미리 생산한다. 나머지는 그때그때 유행과 소비자 반응에 따라 새로 만든다. 디자이너의 구상에서부터 매장에 옷이 깔리기까지 제품 기획과 생산, 출고에 걸리는 시간을 평균 2~3주, 길어야 4주로 단축했기에 가능한 일이다. SPA 업계 경쟁사인 H&M의 8주와 비교해도 훨씬 빠르다.

과거 의류회사들은 제품 기획부터 매장 출시까지 최소 6개월이 걸렸다. 디자이너가 새로운 옷을 구상하는 데 한 달 이상 걸리고, 공장에서 제품을 생산하는 데 3~4개월, 완성품을 배로 실어 매장까지 운송하는 데도 한 달이 필요했다.

자라는 매장 직원들이 어떤 옷이 잘 팔리는지, 신상품에 대한 고객 반응은 어떤지, 최신 유행은 어떤지 등을 본사에 전달하면 디자이너들은 이를 바탕으로 새로운 디자인을 구상하기 시작한다. 구상과 스케치, 디자인은 하루 만에 끝나고 이틀 안에 시제품을 완성한다. 다양한 제품을 소량 생산해 재고를 최소화한다.

자라의 재고율은 15%로 경쟁사 H&M(45%)보다 낮다. 실시간으로 생산을 늘리거나 중단하기 때문이다. 아무리 잘 팔리는 제품도 크기별로 6만 개 이상 만들지 않는 것을 원칙으로 한다. 이슬라 CEO는 “(이 시스템에서) 매장 직원의 역할이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말했다. 직원들과의 소통을 위해 이슬라 CEO는 자신의 사무실을 디자인팀의 작업장과 가까운 곳에 뒀다.

중국과 동남아시아 등으로 공장을 옮기지 않은 것도 높은 효율성의 비결이다. 7000여 개 협력사 공장의 60%는 스페인 포르투갈 터키 모로코에 있다. 제품 생산에 필요한 원단·재료의 60%를 본사 가까이에서 조달한다. 완성품은 유럽 각국 매장에 24시간 내에 배송한다. 북미·아시아 등은 비행기로 48시간 안에 보낸다.

온라인으로 아프리카까지 진출

자라는 온라인·모바일 쇼핑 증가 등 소비자들의 구매 패턴 변화에도 적극 대응하고 있다. 인디텍스 전체로 지난해 온라인 매출은 41% 급증했다. 온라인 판매가 전체 매출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10%로 높아졌다. 온라인을 활용함으로써 오프라인 매장이 없는 곳에서도 판매가 가능해졌다. 오프라인 매장이 있는 96개국 외에 앙골라, 코트디부아르, 세네갈, 가나 등 아프리카에서도 자라 제품이 팔린다.

지난 4월엔 36개국 130여 개 매장에서 증강현실(AR)을 이용한 쇼핑 도우미 앱(응용프로그램)을 선보였다. 스마트폰으로 앱을 실행한 뒤 매장 안 곳곳을 비춰주면 자라 옷을 입은 모델이 걸어나오는 동영상을 볼 수 있다. 카메라에 덧씌워져 보이는 가상 모델 옆에 사람이 함께 서서 사진이나 동영상을 찍을 수도 있다.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에 공유하는 기능도 있다. 새로운 경험을 원하는 젊은 층의 소비 트렌드를 반영한 마케팅 전략이다.

이슬라 CEO는 지속가능한 경영에도 힘을 쏟고 있다. 공장 주변 환경을 보호하고 소비자에게 유해한 물질을 최소화하기 위해 2020년까지 유독성 화학물질 사용을 전면 중단하기로 했다. 의류 생산 과정에서 물 사용량을 40%가량 절감하고 에너지 소비의 20%를 줄이는 프로젝트도 진행하고 있다.

이현일 기자 hiuneal@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