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금알 사업 키우고 M&A 해라"…한국시장 잘아는 토종펀드들 가세
지난해 SK㈜를 타깃으로 주주행동주의 캠페인을 벌인 미국계 돌턴인베스트먼트의 창업자 제임스 로젠월드는 2020년 일본 증시에 대해 “행동주의 2.0 시대가 열릴 것”이라고 전망했다. 배당 증가와 자사주 매입 확대에 머물렀던 일본 행동주의 캠페인이 사업전략 전환, 기업 분할, 인수합병(M&A) 압박 등으로 다변화하면서 건수도 급증할 것으로 예상했다. 실제 일본에서 행동주의 대상이 된 기업 수는 2020년 67곳에서 지난해 107곳으로 60% 급증했다.

일본과 3년여의 시차를 두고 올해는 한국에서 ‘행동주의 2.0 시대’가 본격화하고 있다. 새해 벽두부터 과거에 없던 행동주의 캠페인이 속출하고 있다. 사모펀드(PEF) 출신 전문인력이 속속 행동주의펀드에 뛰어들어 주주행동 전문성이 대폭 높아진 가운데, 펀드 규모도 대형화하고 있어 영향력이 한층 거세지고 있다는 분석이다.
PEF 출신 전문인력이 주도
새해 들어 다양한 형태의 주주행동주의가 잇따르면서 주목을 끌고 있다. 얼라인파트너스는 에스엠엔터테인먼트 이사회와 경영진을 설득해 최대주주의 영향력을 무력화하고 사외이사 중심으로 이사회를 재편하도록 하는 데 성공했다. 얼라인은 7대 금융지주사에 배당성향을 순이익의 50%까지 늘리라는 캠페인도 펴고 있다.

플래쉬라이트캐피탈(FCP)은 핵심 자회사인 KGC인삼공사의 가치만 재평가받아도 KT&G의 주가가 뛸 것이라며 KGC인삼공사의 인적분할 및 재상장 요구를 담은 주주제안을 한 상태다. 차석용 전 LG생활건강 부회장 등을 사외이사 후보로 깜짝 영입했다.

얼라인과 FCP는 모두 경영권 인수를 주업으로 삼은 PEF 출신 인력이 주도하고 있다. 이창환 얼라인 대표는 KKR에서 경력을 쌓았고, 이상현 FCP 대표는 칼라일 한국사무소 대표를 거쳤다.

KCGI(일명 강성부펀드)는 유망한 알짜 중견기업 오스템임플란트 오너 일가의 지배구조 개선과 퇴진을 압박해 M&A를 촉발했다. 트러스톤자산운용은 작년 12월 흥국생명의 지분을 한 주도 보유하고 있지 않은 태광산업의 흥국생명 유상증자 참여를 저지했다.
기업들은 초긴장
전문가들은 올해 3월 주주총회에서 주주행동주의 캠페인이 한층 거세질 것으로 예상한다. ‘동학개미운동’ 이후 소액주주들의 응집력과 발언권이 세진 가운데 지난해 주가가 하락해 기업가치 대비 저평가된 기업이 급증했기 때문이다.

에스엠엔터테인먼트와 오스템임플란트처럼 최대주주의 지분율이 낮은 중견기업을 중심으로 이뤄지던 행동주의 캠페인이 궁극적으로 상장 대기업 계열 지주회사 등으로 확대될 가능성이 크다는 전망이 많다. 이사회의 독립이 이뤄지지 않고, 대주주와 회사 간의 불투명한 사적 계약이 많은 곳 등이 ‘1순위 타깃’이 될 수 있다는 분석이다.

재계 관계자는 “과거엔 행동주의펀드가 공시의무를 피할 수 있는 지분율 5% 미만까지 숨겨오다 주총을 앞두고 깜짝 등장했다면 최근엔 미리 경영진에게 만남을 요청해 카드를 꺼내는 일이 많다”며 “회사 답변까지 먼저 듣고 행동주의 캠페인을 정교히 하다보니 방어하기가 까다롭다”고 말했다. 한 기관투자가는 “한국 사정을 누구보다 잘 알고 주주들에게 어떻게 접근해야 효과적인지 체득해온 토종 행동주의펀드들이 시장의 주도권을 쥐어가고 있다는 점에서 방어하는 기업엔 더 큰 위협이 되고 있다”고 했다.

국내 행동주의펀드들은 대형화에 속도를 내고 있다. 얼라인은 국내외 출자자를 대상으로 1조원 이상 대형 펀드를, KCGI는 6000억원대 후속 펀드 조성을 추진 중이다. 국민연금을 포함한 연기금·공제회들이 행동주의펀드에 출자자로 등장하느냐가 펀드 규모를 결정하는 데 관건이 될 전망이다.

기업들은 긴장하고 있다. 일부 발빠른 기업들의 최대주주와 경영진은 행동주의펀드 대표들을 물밑에서 만나 이들의 동향과 의중을 살피는 데 분주한 모습이다. 자산운용업계 관계자는 “대기업 3세들과 중견·중소기업 대주주들이 최근 행동주의펀드 대표를 만나 의견을 들으면서 불길이 번지기 전에 이들의 주장을 선제적으로 받아들이는 방안을 검토하고 있다”고 말했다.

일각에선 기업들이 미래 사업에 투자해야 할 성장 재원이 자칫 배당 확대 등 단기 차익에 집중한 행동주의 확산으로 위축될 수 있다는 우려가 제기된다. 한국상장회사협의회 등 경제단체들은 차등의결권, 포이즌필 등 세계 주요국에서 보편화된 경영권 방어수단 도입이 시급하다고 입을 모은다.

차준호/하지은 기자 chacha@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