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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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일 새벽 3시9분. 미국 서부텍사스원유(WTI) 5월물 가격이 마이너스에 진입했다. 미니WTI선물 투자를 하던 사람들은 당황했다. 키움증권에서 이들은 서둘러 매도 버튼을 눌렀다. 미니선물은 이날 새벽 3시30분이 만기였다. 만기를 20여 분 앞두고 유가가 하락 폭을 키우자 손실을 줄여보려고 했다. 하지만 허사였다.

키움증권 홈트레이딩시스템(HTS)에 문제가 생겼다. HTS가 마이너스 유가를 인식하지 못했다. 매도 버튼을 아무리 눌러도 먹지 않았다. 유가가 마이너스가 될 줄은 상상도 못했던 키움증권이 프로그램에 마이너스 인식 기능을 넣어놓지 않았던 탓이다. 결국 미니WTI선물 5월물은 만기가 돼 배럴당 -37.63달러에 청산됐다. 일반 원유선물은 만기 때까지 청산하지 않으면 현물 원유를 받아야 하지만 미니선물은 시카고상품거래소(CME)가 만든 파생상품이라 차액만 결제한다. 상당수 계좌가 깡통이 됐다.

원유선물 투자 손실 속출

사상 처음 유가가 마이너스로 가자 국내에서도 손실을 본 투자자가 속출했다. 키움증권뿐만이 아니라 한국투자증권, 유안타증권도 HTS에 마이너스 유가 인식 기능을 넣어 놓지 않아 문제가 생겼다. 매도 버튼이 말을 듣지 않거나 심지어 반대매매도 제때 나오지 않는 사고가 발생했다. 증거금을 모두 소진한 것은 물론 그 이상 손실이 생겨 마이너스가 찍힌 계좌가 속출했다. 이날 한국투자증권 HTS를 쓴다고 밝힌 한 투자자는 “원유선물 3000만원어치가 있었는데 유가가 마이너스로 떨어져서 깜짝 놀라 매도 버튼을 눌렀지만 먹통이었다”며 “결국 3억원에 달하는 평가손실을 봤다”는 글을 인터넷에 남겼다.

현재 증권사들은 정확한 투자 손실 규모를 밝히지 않고 있다. 그러나 규모가 작지 않을 것이라는 게 업계 추산이다.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사태로 원유 수요가 크게 감소해 가격이 20달러대로 급락했을 때 개인투자자가 이를 저가 매수 기회로 인식해 투자를 크게 늘렸기 때문이다. 거래소에 상장된 원유 상장지수증권(ETN) 6개 종목(인버스 제외)의 하루 평균 거래대금은 지난 2월 말 229억원에서 이달 6일 1조347억원으로 급증했다. WTI를 기초자산으로 한 파생결합증권(DLS)의 미상환 잔액은 지난달 9226억원으로 전년 동기 대비 20.5% 늘었다.

ETF 투자자 등은 피해 덜해

이번 시스템 먹통 사태로 가장 큰 피해를 본 투자자는 원유선물을 직접 매수한 사람이다. 원유 관련 ETN이나 상장지수펀드(ETF)를 매수한 사람들은 증권사가 롤오버(근월물 만기가 오기 전에 원월물로 교체하는 것)를 알아서 해준다. 최근 증권사들은 5월물에서 6월물로 바꾸는 작업을 마무리했다. 그러나 원유선물을 직접 매수한 사람들은 롤오버를 직접 해야 한다.

이들은 일반 WTI선물이 아닌 미니선물을 주로 매수했다. WTI선물은 계약 1단위가 1000배럴이지만 미니선물은 500배럴이다. 더 적은 금액으로 WTI선물을 직접 매수할 수 있어 개인 사이에서 인기를 끌었다. 이들은 마지막까지 롤오버하지 않고 버티다가 만기가 코앞에 온 시점에 시스템이 먹통이 돼 최악의 상황을 맞았다.

권오훈 법무법인 오킴스 변호사는 “키움증권으로 투자를 한 개인 두 명이 매도 주문 불발로 손실을 봐 법적 조치를 의뢰한 상황”이라며 “곧 인터넷 카페를 개설해 소송을 낼 추가 인원을 모집할 것”이라고 말했다.

다른 원유 파생상품에도 불똥

이날 유가 폭락으로 다른 원유 관련 파생상품에도 불똥이 튀었다. 파생결합증권(DLS)이 대표적이다. 국내에서 WTI선물을 기초자산으로 한 DLS의 미상환 잔액은 9226억원(지난달 기준)에 달한다. 이들 상품은 100% 손실 구간에 진입했다.

특히 ‘녹인 상품’은 손실을 볼 가능성이 높은 것으로 관측된다. 녹인 상품은 기초자산 가격이 한 번이라도 손실 구간(설정 당시 기준가의 50~55% 미만)에 진입하면 만기 때 손실을 피하기 어렵다. 발행 DLS의 절반 이상이 녹인 상품이다.

원유 관련 ETN, ETF도 손실 폭이 커졌다. 이날 유가증권시장에서 신한레버리지 WTI원유선물 ETN(H)은 38.85% 하락했다. KODEX WTI원유선물(H) ETF도 10.80% 떨어졌다.

양병훈/오형주/고윤상 기자 hun@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