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업 신용강등 '쓰나미'

에쓰오일·SK에너지 등 15개社
4월 등급전망 줄줄이 '하향'
사진=한경DB

사진=한경DB

신용평가회사들이 기업 신용등급 전망을 잇달아 ‘부정적’으로 떨어뜨리고 있다.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의 충격이 실적에 반영되기 시작하자 신용평가사들이 서둘러 개별 기업의 신용등급을 실제로 끌어내릴 수 있다고 경고장을 날린 것이다. 금융시장 경색에다 신용등급 추락 위험까지 겹친 일부 기업은 자금난에 더 시달릴 것이란 우려가 나온다.

14일 증권업계에 따르면 한국기업평가와 나이스신용평가는 전날 증시 마감 후 SK에너지 에쓰오일(64,000 0.00%) 등 9개 기업의 신용등급 전망을 ‘안정적’에서 ‘부정적’으로 낮췄다.

소비재기업이 직격탄을 맞았다. 패션그룹형지를 비롯해 영화사업을 하는 메가박스중앙과 롯데컬처웍스, 정유사인 SK에너지와 에쓰오일이 등급 강등 위험에 처했다. 넥스틸 대성엘텍(703 +1.30%) 대유플러스(623 -1.58%) 대유에이피(5,400 -1.64%) 등 제조업체도 강등 후보군에 포함됐다. 호텔신라(70,900 -0.28%)와 호텔롯데는 이미 지난주 하향 검토 대상에 올랐다.

'신용 줄강등' 공포에 질린 기업들…"회사채 13兆 갚을 길 막막"

이달 들어 하향 검토 대상에 오르거나 부정적 등급 전망을 받은 기업은 15곳에 달한다. 작년 4월엔 1개사에 그쳤다. 신용평가사가 등급 전망을 부정적으로 바꾸면 3~6개월 안에 신용등급을 하향 조정할 가능성이 크다.

등급이 떨어지면 더 높은 금리로 회사채를 발행해야 한다. 회사채를 사들이는 기관투자가 역시 향후 등급이 떨어지면 채권가격 하락으로 평가손실을 볼 수 있어 투자에 소극적일 수밖에 없다. 정부의 자금 지원에도 회사채 시장에 온기가 돌지 않는 이유다.

증권업계에 따르면 올 2분기에만 약 13조원어치의 회사채 만기가 돌아온다. 자체 신용으로 자금 조달이 어려운 일부 기업은 보유 주식이나 부동산을 담보로 잡고 회사채 발행에 나서고 있다. 대형 증권사 채권담당 임원은 “실적 악화가 이어지면 상반기에 신용등급이 떨어지는 기업이 무더기로 쏟아질 가능성이 있다”며 “회사채 시장이 큰 고비를 맞고 있다”고 우려했다.
이달 11곳 신용등급 전망 '부정적'으로…4곳은 하향 검토
정부 지원에도 투자심리 냉랭…"제때 돈 도는 정책 시급"


기업의 신용등급은 자금조달의 핵심 지표다. 등급 하락은 더 비싼 비용으로 돈을 빌려야 한다는 뜻이다. 등급 전망이 ‘안정적’에서 ‘부정적’으로 바뀌는 것만으로도 회사채 발행 금리는 올라간다. 수개월 내에 신용등급이 실제로 떨어질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다.
'신용 줄강등' 공포에 질린 기업들…"회사채 13兆 갚을 길 막막"

떨어질 줄 모르는 기업 신용위험

14일 금융투자협회에 따르면 3년 만기 AA-등급 회사채(연 2.126%)와 같은 만기의 국고채(연 0.996%) 금리 격차는 1.13%포인트를 기록했다. 2010년 3월 이후 10년1개월 만의 최대 격차다. 회사채와 국고채의 금리 격차(스프레드)가 벌어질수록 기업의 부도 위험도 커진다는 뜻이다.

최근의 스프레드 확대 현상은 기업의 신용등급 악화가 직접적으로 영향을 미쳤다는 분석이다. 국내 3대 신용평가회사들은 이달에만 15개 기업의 장기등급 전망을 ‘안정적’에서 ‘부정적’ 또는 ‘하향 검토’로 떨어뜨렸다. 통상 전망이 부정적으로 바뀌면 3~6개월 이내에 등급이 실제로 하향 조정될 가능성이 크다. 하향 검토에 속하는 기업은 언제라도 등급이 추락할 수 있다.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여파가 신용등급 하락으로 이어지자 자금시장은 맥을 못 추고 있다. 지난 13일 한화솔루션(18,850 -0.53%)의 회사채 발행 수요예측에서 이런 분위기가 극명하게 드러났다. 이 회사의 신용등급은 ‘AA-’로 채권시장안정펀드의 지원 대상 하한선에 걸쳐 있었다. 하지만 이 회사가 최근 신평사로부터 등급전망을 ‘부정적’으로 받은 것이 부각되면서 결국 채권시장안정펀드가 청약을 포기했다. 자칫하다간 수개월 내에 지원 대상(AA- 이상)에서 탈락할 수 있다는 우려가 반영된 것이다. 채권시장안정펀드가 청약에 참여하지 않자 일반 기관투자가까지 몸을 사려 결국 목표액 2100억원에 크게 못 미치는 800억원의 매수주문만 접수됐다. 증권업계 관계자는 “업황과 실적에 따라 기업별 자금조달 환경이 차별화되는 분위기가 이어질 것”이라고 내다봤다.

기업들이 기존의 빚을 갚기 위해 회사채 차환 발행에 연이어 나서고 있어 신용등급 하락 추세는 더욱 가팔라질 전망이다. 공모 회사채를 발행하기 위해 신용도를 평가받는 과정에서 등급이 더 떨어지거나 등급 전망이 부정적으로 바뀌는 기업이 줄을 이을 수 있어서다. SK에너지가 대표적이다. 이 회사는 이달 말 3000억원어치 회사채 발행을 위해 신용등급을 평가받는 과정에서 등급 전망이 부정적으로 변경됐다. 국내 기업이 2분기에 갚아야 할 회사채 규모는 총 13조1630억원으로 이 중 5조8702억원어치의 만기가 4월 중에 도래한다.

여전히 미적대는 정부 움직임

기업들은 정부의 지원이 자금조달 환경이 냉각되는 현실을 따라잡지 못하고 있다는 목소리를 높이고 있다. 정부는 이달 들어 20조원 규모 채권시장안정펀드와 산업은행의 회사채 인수 프로그램 등을 가동하며 지원을 시작했다. 하지만 지원 자체가 신중하게 이뤄지다 보니 시장 분위기는 여전히 냉랭하다. 채권시장안정펀드는 적극적으로 소방수 역할을 할 것이란 당초 기대와 달리 투자위험이 작은 기업부터 접근하고 있다. 펀드 운용사들이 매입의사를 보인 기아자동차와 롯데칠성(103,000 +0.49%), 롯데푸드(350,000 +0.14%) 회사채는 모두 AA등급이다.

채권시장안정펀드보다 신용등급이 낮은 기업을 대상으로 한 지원은 아직 본격화되지 못한 상태다. A등급 이상이 지원대상인 회사채 인수 프로그램은 롯데칠성과 기아자동차 등 AA등급을 상대로 이뤄졌다. A등급 이하가 대상인 회사채 신속인수제는 다음달부터 시행된다.

정부가 준비한 지원방안이 모두 가동되기 전에 신용등급 하락 사례가 급증할 경우 자금조달시장 경색을 해소하기가 더욱 어려워질지 모른다는 우려가 나온다.

김은정/김진성 기자 kej@hankyung.com

ⓒ 한경닷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