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자동차업계가 아직까지 내년에 몇 대의 차를 생산하고, 국내외 시장에 몇 대를 팔 수 있을지 계획을 세우지 못한 것으로 30일 확인됐다. 외환위기 이후 처음 있는 일이다. 업계를 둘러싼 환경이 사상 최악 수준으로 나빠지자 내년 전망조차 쉽사리 하지 못한 결과라는 분석이다. 한 완성차업체 관계자는 “올해 본격적으로 시작된 자동차산업 위기는 내년이 절정일 것”이라며 “내년을 잘 넘기지 못하는 업체는 앞으로 헤어날 수 없는 수렁에 빠질 수 있다”고 내다봤다.
2018년 마지막 날까지…車업계 "내년 몇 대 생산할지 계획 못 세웠다"
내년 발간 보고서도 못 낸 車협회

국내 완성차업체가 회원으로 있는 한국자동차산업협회는 매년 11~12월에 이듬해 자동차산업을 전망하는 보고서를 내놓는다. 2000년 이후 한 해도 거르지 않았다. 하지만 협회는 2019년도 전망 보고서를 새해를 이틀 앞둔 시점까지도 내놓지 못하고 있다. 일부 완성차업체가 내년도 생산·판매 계획을 아직 마련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협회는 각 완성차업체로부터 이듬해 계획을 받고, 이를 토대로 전망 보고서를 낸다. 협회의 한 관계자는 “내년 사업환경이 워낙 나쁘고, 예측 불가능한 변수들도 많다 보니 자동차 제조사들이 섣불리 계획을 못 짜는 상황”이라며 “내년 초에 보고서를 낼 계획”이라고 말했다. 일각에서는 협회가 내년 전망 보고서를 아예 발행하지 않는 방안도 검토했다는 얘기가 나온다.

자동차산업협회는 내년 생산 전망치를 400만 대 수준으로 발표할 가능성이 높다. 400만 대는 한국 자동차업계에서 ‘마지노선’ 같은 숫자다. 한국은 2007년 처음 400만 대 넘게 차를 생산했고, 글로벌 금융위기 충격파를 받은 2008년과 2009년을 제외하면 매년 400만 대 선을 지켰다. 연간 생산 대수가 400만 대 아래로 떨어진다는 건 글로벌 금융위기만큼의 큰 위기가 닥쳤다는 의미로 해석될 수 있다.

현장에서는 내년 400만 대 생산이 쉽지 않을 것이라는 관측이 더 많이 나온다. 당장 올해 생산량도 400만 대를 밑돌 뻔했다. 올 1~11월 누적 생산량은 366만3511대였다. 11월과 12월 제조사들이 생산량을 다소 늘리면서 400만 대를 겨우 넘긴 것으로 전해졌다. 정부 관계자들은 지난달까지만 해도 각종 자동차 관련 행사에 참석할 때마다 “올해 400만 대 선을 지키는 게 최대 목표”라고 말했다. 일부 업계 인사들은 정부가 400만 대 선을 지키기 위해 각 업체들에 생산량을 늘릴 것을 은근히 압박한 게 아니냐는 의혹도 제기한다.

관세폭탄 리스크에 최저임금 부담까지

올해 한국 자동차업계는 여러 가지 이유로 어려움을 겪었다. 맏형 격인 현대·기아자동차는 미국과 중국 등 주요 시장에서 판매 부진을 겪었다. 스포츠유틸리티차량(SUV)이 세단 시장을 대체해 가는 트렌드를 따라가지 못한 결과다. 지난 3분기에는 일회성 비용이 발생하면서 ‘실적 쇼크’를 겪어야 했다. 한국GM은 전북 군산공장을 끝내 폐쇄했다. 생산 규모는 줄었고, 노사 갈등은 1년 가까이 이어지고 있다. 쌍용자동차는 7분기째 적자를 내고 있고, 르노삼성자동차도 부진의 늪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있다. 내수 시장의 경쟁자인 수입차 브랜드는 사상 최대 실적을 기록했다.

문제는 내년이 더 어려울 것이라는 사실이다. 당장 글로벌 자동차 수요가 올해보다 줄어들 것이라는 관측이 지배적이다. 현대·기아차를 비롯한 주요 완성차업체들이 해외 시장에서의 부진을 내년엔 만회하리라고 기대하기도 쉽지 않다. 중국 제조사나 전기자동차 전문 제조사 등 새로운 경쟁자들은 꾸준히 시장을 잠식하고 있다. 미국 정부가 엄포한 대로 수입 자동차에 20~25%가량의 고율 관세를 부과하기로 결정하면 연간 85만 대의 수출길이 막힌다.

최저임금의 급격한 인상도 악재 중 하나다. 내년 최저임금은 올해(시간당 7530원)보다 10.9% 증가한 시간당 8350원이다. 유급휴일을 최저임금 산정 기준시간에 포함시키는 최저임금법 시행령 개정안이 31일 국무회의를 통과하면 초봉이 5500만원가량인 현대·기아차에서만 8200명 정도가 최저임금 위반이 된다. 인건비 부담이 늘면 가격 경쟁력이 떨어질 수밖에 없고, 결국 판매 부진을 부채질할 가능성이 높다고 전문가들은 분석하고 있다.

도병욱/박종관 기자 dodo@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