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야가 27일 산업안전보건법 개정안 처리에 극적 합의했다. 김태년 더불어민주당 정책위 의장(왼쪽 두 번째)과 정용기 자유한국당 정책위 의장(오른쪽 세 번째)이 이날 국회 환경노동위 소회의실에서 개정안 처리에 합의한 뒤 악수하고 있다.  /연합뉴스
여야가 27일 산업안전보건법 개정안 처리에 극적 합의했다. 김태년 더불어민주당 정책위 의장(왼쪽 두 번째)과 정용기 자유한국당 정책위 의장(오른쪽 세 번째)이 이날 국회 환경노동위 소회의실에서 개정안 처리에 합의한 뒤 악수하고 있다. /연합뉴스
산업계의 강력한 반대에도 불구하고 여야 정치권이 끝내 산업안전보건법(산안법) 전부개정안을 27일 처리했다. “늘어나는 비용과 무한책임에 비해 산업재해 예방이라는 실익은 거의 없을 것”이라는 산업현장의 하소연은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경제계 관계자는 “정치권은 원청업체와 사업주에게 안전사고에 대해 ‘무한책임’을 지우자는 이 법이 어떤 파장을 불러올지 제대로 논의조차 하지 않았다”며 “산업재해를 줄이자는 취지만 앞세운 졸속 처리의 전형”이라고 비판했다.

조국 국회 출석-산안법 맞바꾼 여야

정치권에선 산업안전보건법 개정안이 통과된 이면엔 더불어민주당과 자유한국당의 ‘빅딜’이 있었다는 분석을 내놓고 있다. 나경원 한국당 원내대표와 국회 환경노동위원회 소위원장인 임이자 한국당 의원은 지난 26일까지도 “정부 개정안의 법 조문이 엉성한 데다 경제계 의견을 충분히 수렴하지 않은 만큼 공청회를 한 번 더 열 필요가 있다”고 주장했다. 한국당이 본회의를 하루 앞둔 상황에서 공청회 필요성을 제기함에 따라 정치권 안팎에선 산안법 개정안의 연내 처리가 사실상 물 건너갔다는 관측이 나왔다.

"원청업체 사업주가 모든 사고 책임질 판"…여론에 떠밀려 '졸속' 합의
하지만 이날 오후 늦게 여야 환노위 간사가 개정안 처리에 합의한 데 이어 3당 원내대표가 국회 운영위원회 소집에 합의한 사실이 알려지면서 “한국당이 산안법 심사엔 관심이 없고 운영위 소집에만 몰두한 게 아니냐”는 지적이 나왔다. 청와대의 민간인 사찰 의혹을 따지기 위해 조국 청와대 민정수석을 불러내기 위한 ‘정치적 거래’의 수단으로 산안법을 활용했다는 지적이다. 정치권의 한 관계자는 “결과적으로 한국당이 조국 수석과 산안법을 맞바꾼 셈”이라며 “산업계 전반에 막대한 영향을 미치는 현장의 목소리는 외면한 채 법안을 정쟁의 볼모로 삼았다”고 비판했다.

원청업체 책임 대폭 확대

기업들은 산안법이 통과돼 산업현장에 큰 혼란이 빚어질 것으로 우려하고 있다. 산업재해를 줄이자는 법안의 취지를 살리지 못한 채 기업들의 부담만 키울 가능성이 크다고 불만을 터뜨렸다. 원청업체 작업장에서 발생한 모든 사고의 책임을 원청업체에 지우자는 조항이 가장 큰 문제라는 게 기업 관계자들의 목소리다. 기존 산안법은 하청업체 근로자가 추락·붕괴 등의 위험이 있는 특정 장소에서 작업할 때만 원청업체가 안전·보건 조치에 대한 책임을 지도록 했지만, 개정안은 이 범위를 원청업체 작업장 전체로 확대했다. 회사 밖에서 이뤄지는 일부 작업에 대해서도 원청업체가 책임지도록 했다. 한 제조업체 대표는 “도급(하청)을 준 업체가 사업장 곳곳에서 이뤄지는 협력업체 작업 전부를 관리하는 건 사실상 불가능하다”며 “현장을 전혀 모르는 공무원과 정치인들이 실현 불가능한 법조문을 만들었다”고 꼬집었다. 도급을 준 원청업체와 도급을 받아 직접 관리해야 할 의무가 있는 협력업체에 똑같은 책임을 부여한 것도 문제라는 비판이 나온다. 독일과 영국, 일본 등 주요 선진국은 도급을 준 업체와 업무를 집행하는 업체의 책임을 명확하게 구분하고 있다.

유해하거나 위험한 작업의 도급을 금지하는 조항을 걱정스럽게 보는 기업인도 많다. 정부와 국회는 이른바 ‘위험의 외주화’를 막기 위한 조항이라고 설명하지만, 오히려 안전 사고가 늘어나는 부작용을 불러올 수 있다는 게 산업계의 대체적인 시각이다. 유해물질을 다루는 작업은 원청업체보다 전문 협력업체가 능숙한데, 이런 현실을 외면한 법안이라는 지적이다. 고용노동부 장관의 승인을 받은 전문업체에는 도급을 줄 수 있다고 하지만, 그 기준이 자의적인 데다 실제 승인을 받기가 쉽지 않을 것이라는 우려가 나온다. 관리 책임 규정을 어긴 사업주의 처벌을 강화한 조항과 고용부 장관에게 재해발생 작업장에 대한 작업중지 명령 권한을 부여한 조항 등도 대표적인 독소조항으로 꼽힌다.

도병욱/배정철 기자 dodo@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