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 한 중견 가전업체 A대표는 지난달 초 독일 베를린에서 열린 유럽 최대 가전박람회 ‘IFA 2018’에 갔다. 해외 가전 트렌드를 알아보기 위해서이기도 했지만 진짜 목적은 따로 있었다. 국내에 들여올 유럽 가전 브랜드를 찾는 것이었다. 그가 돌아본 업체 가운데 한 곳은 유럽에서 꽤 역사가 있는 공방 브랜드였다. 매출은 100억원대였다. 미팅 도중 유럽 가전 브랜드담당자가 A대표에게 물었다. “매출이 얼마나 되나요?” A사의 매출은 1000억~2000억원대였다. 담당자는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매출 규모가 10배 이상인 경쟁력 있는 업체가 뭐가 아쉬워서 관심을 갖는지 모르겠다는 의미였다.

중견 전자업체 사장이 유럽 브랜드를 찾아 헤맨 이유
A대표가 유럽 브랜드 도입에 관심을 갖게 된 것은 최근 몇 년간 국내 가전 시장에서 유럽 가전 브랜드 인기가 크게 높아졌기 때문이다. “비슷한 품질 제품에도 유럽 브랜드가 붙으면 가격이 크게 뛴다”는 게 그의 말이다. 예컨대 비슷한 품질의 소형 주방가전에 소비자들이 기꺼이 지불하는 금액은 국내 브랜드 제품은 3만~5만원, 테팔 필립스 등 유럽 브랜드 제품은 10만~15만원 정도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A사뿐만 아니라 국내 많은 중견 가전업체들이 유럽 브랜드를 찾아다니고 있다.

가격 차이만큼 품질 차이가 나지는 않는다. A대표는 스웨덴 가전 브랜드 일렉트로룩스를 예로 들었다. 일렉트로룩스는 국내 진출 초기 청소기 브랜드로 알려졌다. 지금은 전기 주전자부터 냉장고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제품을 판매하고 있다. 인지도가 높아지자 품목을 다양화했다. 일렉트로룩스는 대우전자로부터 냉장고 등 대형 가전을 주문자상표부착생산(OEM)으로 공급받아 국내 시장에서 판매한다. 일렉트로룩스 냉장고의 실제 제조업체는 대우전자란 얘기다. “똑같은 대우전자 냉장고도 일렉트로룩스 브랜드가 붙으면 가격이 두 배 뛴다”고 A대표는 말했다.

가전뿐만이 아니다. 아동복에서도 이런 현상이 나타난다. 타티네 쇼콜라, 압소바 등 아동복은 프랑스 라이선싱 브랜드다. 실제 의류 디자인과 제조는 국내 업체가 한다. 하지만 프랑스 브랜드를 붙여야 잘 팔리기 때문에 로열티를 낸다.

전문가들은 동조심리 때문에 이런 현상이 나타난다고 분석한다. 곽금주 서울대 심리학과 교수는 “품질이 약간이라도 좋으면 무리해서라도 특정 브랜드를 사려고 하는 현상이 유행처럼 번지고 있다”며 “이는 집단동조 심리 때문”이라고 말했다. 인터넷 쇼핑몰에서 ‘남이 많이 본 상품’이 많이 팔리는 것, 인구의 20%인 1000만 명이 보는 영화가 심심치 않게 나오는 것 등도 집단동조 심리 때문이라는 설명이다. 곽 교수는 “무조건 값비싼 제품을 사기보다 품질 등을 따져봐야 현명한 소비를 할 수 있다”고 했다.

전설리 기자 sljun@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