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성 직업병 가족대책위원회가 지난해 5월31일 충남 아산시 삼성전자 온양사업장을 방문해 생산현장의 환경안전 현황을 점검하고 있다. 한경DB
삼성 직업병 가족대책위원회가 지난해 5월31일 충남 아산시 삼성전자 온양사업장을 방문해 생산현장의 환경안전 현황을 점검하고 있다. 한경DB
삼성전자가 지난 수십 년간 쌓아온 반도체 후공정 기술의 핵심 정보들이 20일 외부에 공개된다. 관련 정보를 담은 삼성전자 온양공장의 ‘작업환경 측정보고서’를 공개하라는 재판부 판결에 고용노동부가 18일 항소하지 않기로 하면서다. 고용부는 더 나아가 “비슷한 정보를 보다 적극적으로 공개하도록 관련 지침을 개정할 것”이라고 밝혔다. 하지만 이 과정에서 산업기밀과 다름없는 한국 반도체·디스플레이산업 노하우가 통째로 유출될지 모른다는 우려가 나온다. 현행 법령에선 관련 정보의 외부 유출을 막거나 제재할 방안이 없기 때문이다.

갈수록 중요해지는 후공정 기술

지난 2일 대전고등법원은 2013년 5월 작성된 삼성전자 온양공장의 작업환경 측정보고서를 공개하라고 판결했다. 이에 따라 해당 자료는 소송을 제기한 변호사단체에 넘겨지게 됐다. 반도체 관련 직업병 문제를 제기해온 시민단체 ‘반올림’은 이 자료를 바탕으로 온양공장의 작업환경을 분석할 예정이다.

문제의 보고서는 2013년 1월 삼성전자 화성공장 불산 누출 사고로 근로자가 사망하는 사건이 발생하자 고용부 주관으로 안전보건공단 등이 같은 해 5월 화성과 온양을 포함한 모든 삼성전자 반도체 사업장을 대상으로 작성했다. 온양공장에서 일하다 백혈병으로 사망한 이모씨의 유족과 시민단체 등은 2014년부터 고용부 등에 이 보고서 공개를 요구했다. 지난해 3월 1심에서는 이 같은 요구가 기각됐지만, 2심 재판부는 개인 신상 등 일부 정보를 제외하고 모두 공개하도록 판결했다.

문제는 보고서에 포함된 정보의 범위다. 삼성전자가 1991년 후공정 전문으로 온양공장을 설립한 뒤 축적한 많은 공정 노하우가 담겨 있다. 각 설비의 위치와 공정 흐름 등은 물론, 화학약품의 종류와 사용량까지 표기돼 있다. 반도체업계 관계자는 “전문가가 해당 보고서를 보면 화학약품 사용량을 통해 삼성전자의 한 해 반도체 생산량을 산출할 수 있고, 이를 매출과 대비해 평균 판매단가까지 추산할 수 있는 수준”이라고 설명했다.

모든 반도체업체가 기밀로 분류하는 정보다. 반도체 공정에서는 어떤 화학물질을 얼마나 쓰느냐에 따라 생산물의 품질이 결정되고, 해당 공정의 성공 여부가 엇갈린다. 오랜 시간 성공과 실패를 반복해야 비로소 획득할 수 있는 ‘레시피’인 것이다.

생산한 반도체를 포장하는 일 정도로 여겨졌던 후공정의 기술적 중요성도 최근 전공정 못지않게 커졌다. 공정 미세화가 한계에 부딪히면서 후공정을 통해 집적도를 높이는 다양한 기술이 개발되고 있기 때문이다. D램을 수직으로 쌓고 구리선으로 연결하는 TSV 공정이 대표적이다. 삼성전자가 높은 수익성을 내고 있는 저장장치 SSD(솔리드스테이트드라이브) 제작도 후공정을 통해 상당 부분 이뤄진다.
'직업병 논란'에 삼성 반도체 노하우 공개한다는데…
다른 사업으로 확산되나 ‘촉각’

삼성전자는 해당 보고서 공개를 놓고 말을 아끼고 있지만 속으로는 전전긍긍하고 있다. 보고서에 담긴 핵심 정보들이 유출되는 것을 막을 수 있는 제도적 장치가 전혀 없기 때문이다. 법적으로 정보공개청구에 승소한 원고는 해당 정보 활용과 관련해 전혀 통제를 받지 않는다. 이번 소송의 원고는 변호사단체지만 반올림이 보고서를 자유롭게 열람할 수 있는 것도 이 같은 이유에서다. 관리 소홀로 보고서가 경쟁업체에 흘러들어가도 제재할 방도가 없다. 지난해 3월에는 강병원 더불어민주당 의원이 국회 보고용으로 제출된 기흥 및 화성공장에 대한 보고서를 일부 언론에 공개해 논란을 빚기도 했다. 안기현 반도체산업협회 상무는 “온양공장의 각종 정보는 지금은 물론 앞으로도 한국 산업을 먹여 살릴 소중한 자산”이라며 “노동자의 생명권과 함께 이 같은 자산도 보호할 수 있는 지혜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하지만 앞으로 이 같은 흐름이 삼성전자 화성·기흥 사업장은 물론 다른 반도체 및 디스플레이업체로 확산될 가능성이 높다는 우려가 나온다. 한 정보공개 전문 변호사는 “특정 자료를 공개하라는 판결이 한번 나오면 추후 비슷한 청구를 하는 다른 민원인에게도 공개를 거부할 명분이 없어진다”고 설명했다. 현재 국회에서는 반도체·디스플레이산업 관련 화학물질 사용 내역을 모두 공개하도록 하는 산업안전보건법 개정이 여당인 더불어민주당을 중심으로 논의되고 있다.

노경목/신연수/심은지 기자 autonomy@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