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아사태가 터진이후 과천 공무원들은 이구동성으로 "기아는 살리되
김선홍회장을 비롯한 기존경영진은 퇴진해야 한다"고 합창해왔다.

"경영에 실패한 이상 응분의 책임을 져야한다"는 것이 그들의 주장이었다.

논리나 명분이 확실한 얘기로 들렸다.

얼마전 대기업의 비서실과 기조실의 폐지문제를 덜먹거렸을 때도 정부는
"문어발식 경영의 사령탑 역할을 하면서도 막상 경영에 문제가 생겨도 책임
지지않는 비정상적인 조직"이라고 주장했다.

그 또한 그럴싸한 얘기로 들렸다.

그런 경제철학을 갖고 있는 정부가 직접 추진해온 단군이래 최대 역사라는
고속철도사업이 실패한 것이나 다름없는 꼴이 됐다.

공기가 7년, 사업비가 3배나 더 들어간다면 그것은 사업조정이 아니라
실패라고 해야 정확한 표현일 것이다.

당초 일정에 맞춰 프랑스에서 제장중인 TGV(고속철도차량)들이 내년부터
무더기로 들어오겠지만 기지창으로 직행, 몇년씩 낮잠을 잘 수밖에 없게
돼있다.

내년에 이 코미디같은 일이 벌어지면 한국의 고속철도사업은 세계적인
웃음거리로 해외토픽감이 될 것이다.

아마 기업에서 이런 일이 벌어졌다면 그 기업은 부도가 났거나 관계자들은
줄줄이 사표를 썼을 것이다.

하지만 고속철도사업과 관련돼 문책사표를 썼다는 공무원이 있다는 말을
들어본 적이 없다.

은행돈으로 벌인 사업에서 실패한 기업인은 자리를 내놓는 것이 "시장경제
의 원칙"이라고 침이 마르도록 되풀이해온 경제부처 관계자들에게 "국민세금
으로 벌인 국책사업이 파탄에 이르렀는데도 관계자들이 요지부동인 것은
무슨 원칙인지" 묻고 싶다.

강경식 재경원장관은 고속철도사업의 수정계획이 발표된지 이틀후 KBS와의
인터뷰에서 "현재의 경제난국은 고비용저효율구조에서 비롯된 것이므로
기업의 경영부실은 스스로 책임져야한다"는 요지의 평소지론을 되풀이했다.

고속철도사업이야말로 "고비용 저효율의 표본"이 아닐까.

이동우 <산업1부 기자>

(한국경제신문 1997년 9월 14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