셰릴 세인트 온지의 '새들을 집으로 부르며'(2018~2020) /서귀포=안시욱 기자
셰릴 세인트 온지의 '새들을 집으로 부르며'(2018~2020) /서귀포=안시욱 기자
수명이 늘어나며 치매로 고통받는 노후에 대한 두려움이 커지고 있다. 기억력 저하로 인한 일상적인 어려움, 가족과 간병인 등 주변인과의 관계, 때론 인간의 존엄성마저 위협하는 순간들까지. 지난해 중앙치매센터가 실시한 조사에서 치매가 암, 뇌졸중 등을 제치고 '가장 두려운 고령자 질병'으로 꼽힌 것도 이런 맥락에서다.

두렵고 감추기만 해야 할 일일까. 예술은 치매와 기억의 불완전성을 어떻게 바라봐야 할까. 제주 서귀포시 포도뮤지엄에서 20일 개막한 기획전 '어쩌면 아름다운 날들'은 이러한 질문을 던지는 전시다. 누구나 마주할 수 있는 삶의 황혼기를 '어쩌면 더 아름다운' 인생의 한 부분으로 바라볼 것을 제안한다.

'소녀 같은 엄마' 촬영한 셰릴 온지

모두가 저마다 다른 기억을 안고 살아가듯, 다양한 분야의 작가들이 각기 다른 해석을 선보인다. 알란 벨처, 루이스 부르주아, 셰릴 세인트 온지, 로버트 테리엔, 더 케어테이커&이반 실, 시오타 치하루, 정연두, 민예은 등이 출품했다.
셰릴 세인트 온지의 '새들을 집으로 부르며'. 인지 저하증으로 기억을 잃어가는 어머니를 찍은 사진 작품이다. /포도뮤지엄 제공
셰릴 세인트 온지의 '새들을 집으로 부르며'. 인지 저하증으로 기억을 잃어가는 어머니를 찍은 사진 작품이다. /포도뮤지엄 제공
미국의 사진작가 셰릴 세인트 온지는 한 백발의 노인을 피사체 삼은 연작 '새들을 집으로 부르며'(2018~2020)를 전시했다. 장난기 가득한 아이나 수줍은 소녀 같은 이 노인은 사실 작가의 어머니다. 바닷가를 산책하거나 농장 일을 하는 등 일상적인 사건들을 따뜻한 시선으로 기록했다.

작가의 모친은 2015년 혈관성 치매를 진단받았다. 미국 뉴햄프셔 농장에서 수십년간 함께한 모녀의 추억도 기억 저편으로 멀어지는 듯했다. 상실감에 빠진 작가는 잠시 작업을 중단하기도 했다. 그러던 중 어느 날 어머니를 비추는 나른한 햇살의 아름다움을 마주했다. 손이 닿는 곳마다 아이폰과 대형 카메라를 들고 어머니의 삶 속 가볍고도 명랑한 순간을 기록하기 시작했다.

조류 관찰자였던 작가의 모친은 치매에 걸린 뒤에도 말총으로 새 둥지를 만들어 놀았다고 한다. 온지는 "어머니는 사진을 찍는 순간만큼은 해맑게 머리를 매만지고 옷매무새를 다듬곤 하셨다"며 "치매라는 낯선 상황에서도 사진을 매개로 어머니와 새로운 관계를 쌓고, 추억을 공유할 수 있었다"고 했다.
루이스 부르주아(Louise Bourgeois)의 '밀실 1'. 노화와 고립을 상징하는 공간을 통해 내면의 경계와 감정의 복합성을 드러낸다. /포도뮤지엄 제공
루이스 부르주아(Louise Bourgeois)의 '밀실 1'. 노화와 고립을 상징하는 공간을 통해 내면의 경계와 감정의 복합성을 드러낸다. /포도뮤지엄 제공
아름다운 기억만 남는 것은 아니다. 프랑스 출신의 세계적인 조각가 루이스 부르주아의 '밀실 1'(1991)은 작가의 유년 시절 장기간 병상에 누워있던 어머니에 대한 기억을 담고 있다. 페인트가 벗겨진 허름한 문틈 사이로 앙상한 침상과 의료 도구들이 들어섰다.
낡은 매트리스에는 'I need my memories: they are my documents(나에겐 기억이 필요해: 그것은 나의 기록들이다)'라는 문구가 새겨졌다.

성장기에 아버지와 가정교사의 불륜을 목격한 작가는 아버지를 향한 적대감과 어머니에 대한 연민을 느끼며 자랐다. 스페인 독감으로 세상을 떠난 어머니의 고통을 떠올리며 6점의 '밀실' 연작을 제작했다. 이번에 전시된 '밀실 1'은 그 첫 번째 작품으로, 국내에 들여온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20분의 화음 끝 20분의 소음

영국의 '예술 듀오' 더 케어테이커(제임스 레이렌드 커비)와 이반 실은 이번 전시를 위해 음악과 회화를 컬래버한 작품을 준비했다. 둘은 1990년대 초반 첫 만남 이후 기억과 인지 상실을 공통분모로 협업해온 오랜 친구다. 더 케어테이커 모든 앨범 표지는 이반 실의 그림이기도 하다.
뮤지션 더 케어테이커(The Caretaker)와 화가 이반 실(Ivan Seal)의 공동작업 '텅 빈 환희의 끝 어디에나'. 기억과 인지가 서서히 상실되는 과정을 음악과 회화로 표현한다. /포도뮤지엄 제공
뮤지션 더 케어테이커(The Caretaker)와 화가 이반 실(Ivan Seal)의 공동작업 '텅 빈 환희의 끝 어디에나'. 기억과 인지가 서서히 상실되는 과정을 음악과 회화로 표현한다. /포도뮤지엄 제공
암전된 공간에 아득한 향수를 자극하는 선율이 흐른다. '텅 빈 환희의 끝 어디에나'(2024)는 총 43분에 걸쳐 11개의 트랙으로 구성됐다. 첫 22분 동안은 오래된 레코드판에서 흘러나오듯 잔잔한 음악 같다. 온전하진 않지만 여전히 아름다운 멜로디가 감돈다. 후반부의 강렬한 굉음 및 소음과 대조된다. 인지능력이 점차 사라지는 과정을 청각적으로 묘사한 작품이다.

원형 전시장 벽에 이반 실의 회화 연작이 걸려있다. 11점의 그림은 음악의 각 트랙과 조응한다. 인간의 얼굴이나 조각을 연상케 하는 형태인데, 그 모습은 시간이 지날수록 추상적으로 왜곡된다. 결국 연작 마무리 부분에 극단적으로 단순화된 직선에 이른다. 지난했던 소음 뒤에 잠시나마 과거의 아름다운 선율이 선명해지고, 이내 모든 것이 끝나는 인생을 암시한다.

100년 살다 간 배롱나무의 생애

전시의 하이라이트는 1층에 설치된 6m 높이 배롱나무다. 100여년을 살다가 생을 마감한 배롱나무는 앙상한 가지만 남은 모앙새다. 영상이 시작하면 제주의 계절을 따라 매화와 유채, 벚꽃이 피고 진다. 주위에 펼쳐진 갓난아이와 어린이, 노인 등 주민들의 영상을 배경으로 조용히 자신의 순간을 기다린다. 잔뜩 만개한 나무는 담담하게 꽃잎을 떨어뜨리며 다시 겨울을 맞이한다.
포도뮤지엄이 직접 기획한 테마 공간 'Forget Me Not'은 몰입형 예술 작품으로, 100년의 생을 산 배롱나무의 생애를 압축적으로 표현했다. /포도뮤지엄 제공
포도뮤지엄이 직접 기획한 테마 공간 'Forget Me Not'은 몰입형 예술 작품으로, 100년의 생을 산 배롱나무의 생애를 압축적으로 표현했다. /포도뮤지엄 제공
포도뮤지엄과 조경 수무 등의 공동작업으로 완성된 작품이다. 8채널 영상으로 프로젝션 맵핑 기술이 도입됐다. 지난해 포도뮤지엄에서 진행한 '추억의 비디오' 공모전에 참여한 관객들의 실제 비디오 영상이 활용됐다. 배롱나무는 김희영 포도뮤지엄 총괄 디렉터의 집 앞을 지켜온 나무다. 2년전 수명을 다한 나무는 인생의 기억을 함축해서 보여주는 작품으로 다시 태어났다.

국내 치매 인구는 100만명에 달하고, 65세 이상 노인 10명 중 1명은 치매를 앓고 있다. 김희영 총괄 디렉터는 "초고령화 사회 진입을 눈앞에 둔 현시점에서, 점차 많은 인구가 겪게 될 인지 저하증을 처참한 질병이 아닌 생의 자연스러운 과정으로 받아들이기 위해 마련한 전시"라고 말했다. 전시는 내년 3월 20일까지. 서귀포=안시욱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