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가 김용익이 자신의 스튜디오에서 물감 소진 프로젝트를 펼치고 있다.
작가 김용익이 자신의 스튜디오에서 물감 소진 프로젝트를 펼치고 있다.
지금 우리 집에 있는 볼펜과 색연필, 연필들을 모두 떠올려 보자. 과연 몇 년을 써야 다 소진할 수 있을까. 물감을 다 쓸 때까지 새로운 색을 사거나 수집하지 않겠다고 선언한 작가가 있다. 1947년생 화가 김용익이다. 그는 남은 여생 동안 물감을 단 한 개도 사지 않고 갖고 있는 물감을 모두 끌어다 쓰는 ‘물감 소진 작업’을 하고 있다.

김용익은 국제갤러리 부산과 서울 한옥에 실험 정신과 신념이 담긴 작품들을 가지고 찾아왔다. 개인전은 6년 만이다. 부산에선 대작을 중심으로 19점이, 서울 한옥에는 작은 작업 27점이 걸렸다. 이번 전시에 나온 작품들은 모두 그의 2016년 이후 작품들이다.
작가 김용익.
작가 김용익.
김용익은 미술적 일탈을 일삼아 온 작가다. 이번 전시에 나온 작품들도 그의 ‘일탈 정신’을 잘 드러낸다. 현장에 나온 그는 이 신념을 유토피아의 반의어인 ‘헤테로토피아’라는 단어로 지칭했다. 그는 부산 갤러리 땅바닥 한가운데에 그림을 내려놓았다. 회화는 벽에 걸려 있어야 한다는 고정관념을 깼다. 캔버스가 오염되지 않도록 씌워 오는 비닐을 벗기지 않은 채 그 위에 그림을 그린 작품도 있다.

그에게 전시장이란 곧 자유와 반항의 공간이다. 김용익이 이런 반항을 하는 데에는 작가로서의 정체성 혼란이 반영됐다. 그는 “오히려 어릴 적에는 손이 가는 대로 쉽게 작업했는데, 나이가 들고 더 많이 알고 나니 더욱 혼란스러워졌다”며 “이제 내 작품을 나도 잘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고, 그 고통과 혼돈을 표현하기 위해 시작했다”고 말했다.
김용익, '절망의 미완수 22-1'.
김용익, '절망의 미완수 22-1'.
이번 전시에 나온 작품 중 하나에는 철망이 씌워졌다. 굳이 완성한 그림 위에 잘 보이지 않도록 필터 한 겹을 더 씌웠다. 하지만 이 작품의 하이라이트는 철조망을 비스듬히 봐야 알 수 있다. 철망 위에 그대로 붙은 한 마리의 모기가 보인다. 작품 위에 날아왔다 붙어 죽은 모기를 그림을 운반하던 중 발견하곤 그 시체까지 작품의 일부분으로 만들었다. 그는 “질서 속에서 벗어나지 않는 순간 매몰된다”며 자신의 반항기를 설명했다.

무엇보다 현재의 김용익이라는 작가를 가장 잘 표현하는 건 ‘물감 소진’이다. 그는 회화 작가임에도 더이상 물감을 구매하지 않는다. 오직 갖고 있는 물감만으로 작업해 그 물감을 바닥까지 모두 긁어쓰는 작업을 2018년 마지막 날에 시작했다. 그는 “물감을 소진하는 건 곧 내 인생을 소진하는 것이나 마찬가지다”며 “이 모든 물감을 다 썼을 때 내 인생도 끝났으면 좋겠다고 소망한다”고 말하기도 했다.
김용익, '물감 소진 프로젝트 24-2 망막적 회화로 위장한 개념적 회화'.
김용익, '물감 소진 프로젝트 24-2 망막적 회화로 위장한 개념적 회화'.
맨 처음 그는 캔버스를 조각보처럼 칸칸이 나눠 물감을 바른다는 발상을 떠올렸다. 여러 색의 물감을 골고루 소진하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반항의 작가였던 김용익에게 네모 칸 위에 색칠을 반복하는 작업은 금방 지루해졌다. 그래서 캔버스의 자리를 네모, 세모, 원 등 여러 모양의 도형으로 나눴다. 그는 “초기엔 물감을 금방 쓸 것 같다는 생각에 작품을 그릴 때 색을 연하게 칠했다”며 “현재는 써도 써도 줄어들지 않는 물감 때문에 짙고 두껍게 물감을 바른다”고 말하며 웃었다.

예술의 의미에 대해 묻자 김용익은 ‘킬링타임’이라는 답변을 내놨다. 그는 “단순히 즐겁고 재미있다는 의미보다는 ‘시간을 죽인다’는 의미가 담긴 표현이다”라고 말했다. 그는 오늘도 시간과 물감을 소진하고 있다. 어떤 일이 있어도 매일 쉬지 않고 딱 두 시간씩만 작업한다. 77세 작가의 즐거운 사춘기같은 전시는 4월 21일까지 이어진다. 최지희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