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9일 미국 조지아주에서 유세 중인 도널드 트럼프 전 대통령 /AFP연합뉴스
지난 9일 미국 조지아주에서 유세 중인 도널드 트럼프 전 대통령 /AFP연합뉴스
“트럼프 집권 2기에 대비하라.” 올해 초 영국 시사 주간지 이코노미스트는 도널드 트럼프의 대통령 재선 가능성이 커지면서 세계 각국이 패닉에 빠져들고 있다고 분위기를 전했다. 경험 많은 참모들의 제어를 받았던 1기와 달리 트럼프 2기는 그야말로 폭주할 가능성이 크다. 모든 국가를 상대로 관세를 10%로 올리고, 우크라이나와 대만 방어를 포기할 수 있다는 얘기가 나온다. 자유주의 동맹국과 거리를 두면서 권위주의 국가의 ‘스트롱맨’들과 친분을 과시할 것으로 보인다. 더 나아가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세계의 번영과 평화를 지탱해왔던 질서가 해체 수순을 밟을 거란 우려도 나온다.

미국 대선을 8개월 앞두고 출간된 <30년의 위기>는 트럼프 집권 1기를 돌아보면서, 세계 질서 변화의 큰 흐름을 역사적 맥락과 함께 살펴본다. 책을 쓴 차태서는 성균관대 정치외교학과 교수다. 학자의 책답게 과거에 일어났던 혹은 현재 진행 중인 생생한 이야기보다 거대 담론이 주를 이룬다.

명저 '역사는 무엇인가'로 많이 알려진 영국의 정치학자이자 역사가 에드워드 핼릿(E.H.) 카는 1939년 <20년의 위기>란 책을 냈다. 카는 20세기 초반의 혼란을 영국이란 패권국의 쇠락과 한 세기 동안 정치적·경제적 생각을 지배해온 이념(자유방임주의)의 붕괴에서 찾는다. 2차 세계대전 발발이 임박했던 1937년, 카는 빅토리아식 자유방임주의로 다시 복귀할 것으로 주창한 월터 리프먼을 비판하며 “지난 과거에서 유토피아를 찾는 것은 도무지 이해가 안 되는 시대착오일 뿐이다. 역사는 진로를 거꾸로 되돌리는 법이 없다”고 했다.

역사의 궤적은 카의 예상과 달랐다. 종전 후 세계는 미국 주도의 ‘팍스 아메리카나’를 이룩했고 1980년대 들어선 신자유주의라는 이상주의가 지배 이념이 자리잡았다. 하지만 탈냉전 후 30년을 지배한 범세계주의와 단선적 진보론에 기반한 자유주의 세계질서 건설 프로젝트는 다시 붕괴 위험을 맞았다. 공산권 붕괴 이후의 오만, 현실과 동떨어진 교조적 이념으로의 변질이 원인이 됐다. 저자는 “자유주의의 승리가 확정된 듯 보였던 탈냉전기에 거의 죽은 사상가 취급을 받았던 카가 오늘날 체제 전반의 위기와 맞물려 다시 주목받고 있다”고 했다.
트럼프주의는 정녕 미국을 다시 위대하게 만들 수 있을까
책은 카의 현실주의 관점을 차용해 미국의 정치 운동 사상 계보와 팍스 아메리카나의 해체 과정을 추적한다. 저자에 따르면 트럼프주의는 갑자기 나타난 것이 아니다. 이미 오래전부터 존재했지만 변방으로 밀려났던 정치사상이 ‘중도의 몰락’과 함께 부상했을 뿐이다. 제7대 대통령 앤드루 잭슨(1767~1845)의 이름을 딴 잭슨주의가 그런 예다. 미국 국익을 최우선으로 하는 고립주의 노선이며, 반엘리트적 포퓰리즘을 내세운다.

80년 전 세계는 새로운 세계질서를 세웠지만 두 차례의 격렬한 전쟁을 치르고 나서였다. 저자는 “마치 전간기가 1차 세계대전과 2차 세계대전 사이의 짧은 간주곡에 불과했던 것처럼, 지난 탈냉전 30년의 좋은 시절도 구냉전과 신냉전 사이의 휴지기에 불과했던 것은 아닐까”라고 질문을 던진다.

트럼프의 ‘미국을 다시 위대하게 만들자’는 이상화된 과거를 그리워한다는 점에서 퇴행적이지만, 바이든 등이 말하는 좋았던 팍스 아메리카나 체제로 돌아가야 한다는 구호 역시 퇴행적이긴 마찬가지라고 지적한다. 이미 트럼프 집권 이전부터 미국 단극 체제는 문제를 노출하며 무너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결국 관건은 새로운 사회경제적 토대를 세울 수 있느냐다. 자본주의의 ‘위대한 리셋’ 혹은 새로운 사회계약의 수립이 수반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저자는 “개혁가들이 명확한 비전을 가지고 위기를 기회로 전환할 수 있는 기획을 작동시키지 못한다면, 오히려 전간기와 유사하게 반동적 극우 세력이 자신들의 배타주의적 민족주의와 권위주의 기획을 관철하는 삼을 것”이라고 우려한다.

미국의 정치 지형 변화를 한 눈에 살펴볼 수 있는 점은 이 책의 장점이다. 다만 전반적으로 분석이 불완전하다. 경제를 다루지 않고, 자유주의의 어떤 점이 문제인지 그 대안은 무엇인지 잘 드러나지 않는다.

임근호 기자 eigen@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