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를 바라보는 눈알을 어디에 붙여 둘 것인지에 대한 고민은 그 자체로 훌륭한 형식이 된다. 유령이 주인공인 단편소설(임선우의 소설집 『유령의 마음으로』)이나 존비어체계에 대한 전복적 시선으로부터 도출된 ‘평어’ 사용 시도(이성민의 평어 에세이 『말 놓을 용기』) 등의 색다름은 모두 눈알의 위치로부터 시작되었다.

목소리가 없었던 곳에 눈알을 붙이고 그것이 스스로 말하게끔 두어 보면 낯선 형식과 새로운 이야기가 자연스레 가능해진다. 책을 덮은 뒤에도 잠잠한 사물들을 가만히 내려다보며 이것 역시 말을 할 수 있을지 몰라, 하고 기대를 품게 되는 것은 이러한 ‘눈알 붙이기 시도’가 내게도 옮겨붙어 오래도록 이어지는 덕분이다.
말 없는 물건에 눈알을 붙여 봅시다 … '네쓰케'를 통해 본 가족의 역사
도예가 에드먼드 드 발의 책 『호박 눈의 산토끼』는 ‘네쓰케’를 통해 가족의 역사를 되짚어 보려는 시도다. 네쓰케는 주먹만 한 크기에 놀라운 정교함을 자랑하는 일본의 자기 조각품으로, 프랑스 등지에서 일본 문화가 크게 유행할 때 유입되어 많은 수집가들의 소유욕을 자극하였다. 에드먼드 드 발의 추적기에 따르면 그의 가족 대대로 내려온 네쓰케 모음은 세 번의 대이동을 겪었다.
호박 눈의 산토끼
호박 눈의 산토끼
첫 번째 대이동, 일본에서 프랑스로. 네쓰케를 처음 사들인 조상의 이름은 ‘샤를’로, 그는 프루스트 소설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의 등장인물 ‘스완’의 실제 모델이었다. 그는 당대 실력 있는 미술 작가들의 작품을 발 빠르게 수집하였으며 그의 집은 미술계 경향을 한눈에 훑어볼 수 있는 작은 전시장을 방불케 했다. 네쓰케 수백 점 역시 그의 집 한켠에 자리하며 많은 작가들의 손에 쥐어졌다 놓이기를 반복했다.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두 번째 대이동, 프랑스에서 오스트리아로. 샤를은 사촌 ‘빅토어’의 결혼 선물로 네쓰케 264점을 보낸다. 오스트리아 빈의 대저택에서 방황하던 네쓰케는 빅토어의 아내 ‘에미’의 옷방 진열장에 자리를 잡는다. 아이들을 제외하면 네쓰케를 유심히 들여다보는 이는 이제 아무도 없다. 아이들은 네쓰케를 감상하기보다 그것에 이야기를 부여해 인형처럼 가지고 논다. 빅토어와 에미, 그들의 집을 드나드는 수많은 손님들은 네쓰케에 관심이 없다.

세 번째 대이동, 오스트리아에서 다시 일본으로. 나치 독일이 오스트리아에 입성하면서 유대인 빅토어와 에미의 자녀들은 뿔뿔이 흩어지고, 둘의 망명 시도는 거듭 좌절된다. 딸 ‘엘리자베트’의 노력 끝에 마침내 둘은 오스트리아 국경을 넘는 데 성공하지만 에미는 곧 죽음을 맞이한다. 오스트리아 빈의 저택은 때마다 용도를 달리하여 각종 본부로 사용되고 벽을 수놓은 미술 작품들은 하루아침에 다른 이들의 소유가 된다. 미국에 머물다 오스트리아에 돌아온 아들 ‘이기’는 그때까지도 아무도 가져가지 않은 네쓰케들을 도쿄로 데려간다. 말년 내내 도쿄에 머무른 이기 곁에서 네쓰케는 다시금 사람들의 손에 쥐여지기 시작한다. 도쿄에서 네쓰케는 더 이상 이질적이지 않다. 그곳에서 네쓰케는 생소한 수집품이기보다는 과거에 대한 향수를 불러일으키는 오랜 친구와 같다. 우리 집에도 저런 것이 있었지. 사람들은 네쓰케를 손에 쥐고 각자의 이야기를 가볍게 털어놓고는 하였다.
The Hare with Amber Eyes netsuke, by Masatoshi, Osaka, c. 1880, signed. Ivory, amber buffalo horn / ⓒWikipedia
The Hare with Amber Eyes netsuke, by Masatoshi, Osaka, c. 1880, signed. Ivory, amber buffalo horn / ⓒWikipedia
네쓰케가 전혀 언급되지 않는 가족사 가운데에서도 나는 장식장 한켠에서 그들을 건너다보고 있을 네쓰케를 떠올리고 만다. 에드먼드 드 발이 네쓰케의 작은 몸통에 눈알을 붙여 둔 덕분이다. “도예가 에드먼드 드 발이 네쓰케를 통해 가족의 역사를 되짚어 보았다.”라는 문장은 “도예가 에드먼드 드 발이 다름 아닌 네쓰케에 눈알을 붙이기로 결심했다.”라는 문장으로 다시 쓸 수 있다. 그 안에 속한 개인을 짐작하기 어려울 만큼 거대한 역사의 흐름이 네쓰케에 붙여진 눈알을 통해 개인의 이야기로 잘게 쪼개진다. 에드먼드 드 발의 이 간단한 공작은 역사를 한 개인의 이야기로 전달하는 데 더없이 효과적인 장치로 기능한다. 역사가 이야기가 되자 네쓰케가 본 것, 네쓰케의 생김새뿐만 아니라 네쓰케를 손에 품은 사람의 온기까지 자연스레 떠올려보게 된다. 이런 체험은 아주 드물게 온다는 것을 이제는 알고 있기에, 내게 『호박 눈의 산토끼는』 고마운 책이었다. 이야기는 죽은 문장에 숨을 불어넣고 먼 과거의 일을 눈앞에 불러온다. 매일 아침 주머니에 눈알을 넉넉히 마련해 둔 채 집을 나서야겠다는 다짐이 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