온라인 거래 사기 사건에서 계좌번호 등을 이용당한 판매자가 돈을 떼인 구매자에게 손해배상 책임을 질 필요는 없다는 대법원 판단이 나왔다. 사기꾼이 판매자 행세하며 구매자에게 접근해 대금을 빼돌리는 식의 ‘삼자사기’ 사건에서 선량한 판매자에게 배상 책임까지 물을 수는 없다는 취지다.

대법원 1부(주심 오경미 대법관)는 돈을 떼인 구매자 B씨가 판매자 A씨를 상대로 제기한 부당이득금 청구 소송에서 이 같은 취지로 사건을 파기 환송했다고 26일 밝혔다.

사건은 A씨가 2021년 말 온라인 중고 거래 사이트에 굴삭기를 6500만원에 판매한다는 글을 올리며 시작됐다. 사기범은 A씨에게 굴삭기를 사겠다고 접근해 계좌번호 등을 요구했다. 이를 바탕으로 사기범은 A씨를 사칭해 굴삭기 구매자를 물색한 뒤, B씨에게 굴삭기를 5400만원에 팔겠다고 제안했다.

피해자인 B씨는 사기범 요구대로 A씨 계좌에 5400만원을 송금했다. 사기범은 A씨에게 이 돈을 자신이 보낸 것처럼 행세하며 “세금 신고 문제 등을 이유로 5000만원을 다른 계좌로 보내주면 다시 잔금을 이체해주겠다”고 속인 뒤 돈을 받고 잠적했다. 사기범의 행방이 묘연한 가운데 잔금을 받지 못한 A씨와 피해자 B씨 사이에 분쟁이 벌어졌다. B씨는 A씨를 상대로 5400만원을 돌려달라는 소송을 냈다.

1심 재판부는 사기범이 가로챈 5000만원은 A씨 책임이 아니라고 보고 400만원만 반환하라고 판결했다. 반면 2심 재판부는 “A씨가 불법행위를 방조했으므로 손해배상 책임을 져야 한다”는 B씨의 주장을 일부 받아들여 2000만원을 추가로 배상하라고 판결했다.

그러나 대법원은 1심과 마찬가지로 A씨에게 400만원 외에 배상 책임은 없다고 결론 내렸다. 대법원은 “A씨는 불법행위를 예견할 수 없었고 그도 사기범에게 속아 계좌번호 등을 전송해 준 피해자일 뿐”이라고 판단했다.

대법원은 “A씨는 매수인으로 알았던 인물의 요청에 따라 돈을 다른 계좌로 이체한 것일 뿐”이라며 “이런 이체 행위를 비정상적 거래로 단정할 수 없다”고 설명했다.

허란 기자 why@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