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REUTERS
사진=REUTERS
‘잃어버린 30년’을 지나면서 일본 주식은 현지 투자자들로부터 ‘오와콘’(한물간 콘텐츠)이란 별명을 얻었다. 1989년 12월 ‘버블 경제’ 정점에서 기록한 닛케이지수 38,915.87은 다시는 닿을 수 없는 ‘천장’이었다. 거품 경제 붕괴 후 일본인들은 일관되게 주식을 팔아치웠다.

지난 22일 닛케이지수가 39,098.68을 기록하며 34년여 만에 천장을 뚫은 것은 일본인이 아니라 외국인의 힘 덕분이다. 일본 증시의 외국인 투자자 비중은 1985년 7%에서 현재 30% 수준으로 늘었다.

野性 살아난 日기업…'주식 포비아' 잠재웠다
외국인 투자자가 주목한 것은 일본 기업의 변화였다. 기업들이 ‘돈 버는 힘’을 키우고, 투자자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는 것에 주목했다. 선순환까지 끌어냈다. 일본 반도체 장비기업 디스코의 세키야 가즈마 사장은 “해외 투자자의 객관적인 의견은 경영에 유익하다”고 말했다.

일본 증시가 사상 최고치를 경신한 핵심 요인은 ‘기업가정신’이라는 게 전문가들의 분석이다. 전통의 대기업이 혁신을 거듭한 가운데 강한 성장 의욕을 가진 창업 경영자들도 가세했다. 김채윤 NH증권 연구원은 “일본 기업들이 경쟁력을 강화하면서 펀더멘털이 개선됐다”고 말했다.

23일 니혼게이자이신문에 따르면 거품 경제 붕괴 후 34년간 주가가 10배 이상 급등한 ‘텐배거’ 일본 기업은 142곳이었다. 혁신 기업과 하이테크 기업이 상당수였다. 영국 베일리기포드가 1985년부터 운용 중인 투자신탁 신닛폰 담당자들은 “미래를 내다보는 야심 있는 창업자에게 매력을 느낀다”며 매년 일본을 방문해 고성장 기업을 찾았다.

규동 체인 ‘스키야’를 운영하는 젠쇼홀딩스가 대표적이다. 오가와 겐타로 회장이 1982년 창업해 1997년 상장한 기업이다. 젠쇼홀딩스는 식자재 조달부터 제조, 물류를 시스템화해 비용을 줄이는 독자적인 구조를 만들어냈다. 하나의 시스템으로 규동, 패밀리 레스토랑, 회전 초밥 등 서로 다른 가게를 운영해 ‘규모의 경제’를 극대화했다.

이 회사 주가는 27년 만에 236배 올랐고, 일본 외식업체 최초로 시가총액 1조엔을 돌파했다.

'30년 침체' 뚫고 강해진 日기업…정부는 밸류업 지원
"기술 경쟁력으로 돈 버는 힘 길러"…기업들 경상이익률 6% 넘어서

野性 살아난 日기업…'주식 포비아' 잠재웠다
젠쇼홀딩스는 역설적으로 일본의 디플레이션이 키운 기업이기도 하다. 일본이 경기 침체 속 물가 하락을 겪으면서 철저한 구조화를 거쳐 비용 경쟁력을 갖춘 기업만 살아남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가구 유통기업 니토리홀딩스, 의류 소매회사 패스트리테일링 등도 마찬가지 경우다.

뛰어난 기술력으로 세계를 선도하는 하이테크기업 또한 눈에 띈다. 반도체 장비기업 레이저테크는 1990년 상장 이후 주가가 171배 급등했다. 이 회사는 반도체 웨이퍼 전용 회로의 원판을 검사하는 장치로 세계 시장을 장악하고 있다. 오카바야시 사토시 레이저테크 사장은 “고객의 소리에 진지하게 마주하면서 기술의 씨앗을 뿌려 왔다”고 강조했다.

○기업·정부·중앙은행 3박자

니혼게이자이신문은 23일 일본 증시가 사상 최고치를 기록한 것과 관련해 “신흥·중견기업이 성장을 이끄는 일본 증시의 매력이 커지고 있다”고 분석했다. 기업들의 ‘돈 버는 힘’이 커지고 있다는 이야기다. 일본 재무성에 따르면 2010년 2%대이던 일본 기업의 매출 대비 경상이익률은 지속적으로 올라 지난해 6%를 넘어섰다. 한국은행 도쿄사무소는 “코로나19 사태 이후 제조업의 경상이익 증가율이 높아지면서 주력 수출업종인 전자·기계 업종의 주가 상승세가 뚜렷하다”고 진단했다.

투자에 소극적이던 일본 기업들도 점차 투자를 늘리는 추세다. 닛세이기초연구소와 일본 내각부에 따르면 1990년대 한때 90조엔을 넘은 일본 기업 연간 설비투자액(명목 기준)은 2000년대 들어 70조~80조엔 수준이었다가 2020년 이후 증가세를 이어가 지난해 처음 100조엔을 넘어선 것으로 추산된다.

닛케이지수가 사상 최고치를 경신한 것은 기업들만이 이뤄낸 성과는 아니다. 일본은행의 금융완화 정책에 따른 엔저는 기업의 수출과 이익이 동시에 개선되는 효과를 가져왔다. 4년 연속 글로벌 판매 1위 도요타자동차는 연간 영업이익 전망치를 4조5000억엔에서 4조9000억엔으로 4000억엔 상향 조정했는데, 이 가운데 2350억엔이 ‘환율 효과’다.

엔저는 수입 물가 상승에 따라 일본 경제의 디플레이션 탈출 기대를 높이고, 관광지로서 일본 방문 매력을 높이는 부가적인 효과도 내고 있다.

일본 정부와 도쿄증권거래소의 기업가치 제고 정책도 닛케이지수 강세 원인으로 조명받고 있다. 도쿄증권거래소는 지난해부터 주가순자산비율(PBR)이 1배를 넘지 않는 기업에 기업가치 제고 계획을 세우라고 요구했다. 이에 기업들이 자사주 매입 등으로 화답해 일본 증시 내 ‘PBR 1배 초과’ 기업 비중은 2022년 말 47.1%에서 현재 62.2%로 급증했다. 미국 뉴욕증시 S&P500 종목 중 PBR 1배 이하 종목이 3% 수준이라는 것을 감안하면 일본 증시가 상승 여력이 더 있다는 분석도 나온다.

○일본 개미 마음도 얻을까

외국인 투자자에 이어 일본인도 도쿄증시에 돌아올 수 있도록 유도하는 것은 과제다. 일본 정부는 지난달부터 납입 한도를 대폭 높이고, 비과세 기간을 늘린 새로운 소액투자비과세제도(NISA)를 도입했다. 니혼게이자이신문은 “닛케이지수 최고치 경신이 일본 주식을 사지 않는 일본인의 행동이 바뀌는 계기가 돼야 한다”고 했다.

일본은행의 금리 인상은 향후 증시에 부담으로 작용할 수도 있다. 시장에선 일본은행이 이르면 3~4월 17년 만에 금리를 인상할 가능성이 높은 것으로 보고 있다. 일본은행 금융정책결정회의 일부 위원은 지난달 회의에서 “금융 정상화 요건이 충족되고 있다”며 마이너스 금리 해제를 직접적으로 언급했다.

○글로벌 증시 랠리에도 한국은 제자리

글로벌 증시 랠리에서 한국은 상대적으로 소외돼 있다. 정부가 지난해부터 공매도 금지, 대주주 주식양도세 완화 등 각종 증시 부양책을 내놓고 있지만 기대만큼 성과가 나타나지 않는 모습이다. 금융투자소득세 폐지까지 약속했지만 반응은 미지근하다. ‘선거용에 그치는 것 아니냐’는 개인투자자의 의구심 때문이다.

이런 가운데 한국 정부도 오는 26일 ‘기업 밸류업 프로그램’을 발표한다. 한 대기업 최고재무책임자(CFO)는 “자칫 해외 행동주의 펀드의 배만 불릴 수도 있는 만큼 장기적인 관점에서 이 프로그램을 추진해야 한다”고 말했다.

김일규/신정은 기자 black0419@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