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이솔 기자
사진=이솔 기자
2024년 1월 26일은 글로벌 IT 산업의 역사에서 또 하나의 명장면으로 기록될 가능성이 높다. 전 세계에 인공지능(AI) 돌풍을 일으키고 있는 39살의 야심만만한 미국의 ‘IT 그루’가 한국을 방문한 날이다. 주인공은 1985년생인 오픈AI의 샘 올트먼 CEO다.

그를 만나기 위해 최태원 SK그룹 회장은 제안서 뭉치를 직접 손에 들고 미팅 장소에 들어갔다. 미처 봉(綘)하지 못한 서류는 시급성을 적나라하게 보여줬다. 짐작건대 최 회장은 올트먼과의 ‘AI 동맹’을 위해 SK가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인지를 미팅 전에 임원들과 긴급히 상의했을 것이다.

이재용 삼성 회장이 직접 나오지는 않았지만, ‘챗 GPT의 아버지’에 대한 삼성의 대우도 극진했다. 삼성전자 반도체를 총괄하는 경계현 대표이사 사장은 그를 삼성전자의 첨단 반도체 기술을 총망라한 금단에 가까운 평택 공장으로 직접 안내했다. 하루에 두 끼 식사를 같이한 것으로 알려졌다.
최태원 손에 든 제안서…39년 전 '이병철-잡스' 회동의 데자뷔 [박동휘의 재계 인사이드]

1983년 이병철 회장의 잡스 평 "IBM과 맞설 인물

떠들썩했던 올트먼의 방한은 39년 전인 1983년 11월, 28세의 스티브 잡스가 삼성을 방문했던 일을 떠올리게 한다. 전두환 신군부의 서슬이 퍼랬던 그 시절의 서울은 지금의 베트남 하노이보다 가난했다. 한국의 1인당 GDP가 3000달러를 넘으려면 아직 5년이 더 필요했다.

애플의 창업자인 잡스가 한국을 방문한 건 오로지 삼성을 만나기 위해서였다. 떠들썩하고 때론 예의 없는 몽상가였던 잡스는 미래의 PC와 전화기는 휴대성을 갖춰야 한다고 믿었다. 실제로 그는 꿈을 현실화했다. 하지만 당시만 해도 잡스가 몽상을 실현하려면 칩(chip)이 필요했다.

미국에선 파트너를 찾기 어려웠다. ‘IBM 제국’이라는 난공불락의 성을 뚫는 건 불가능에 가까웠다. 아시아로 눈을 돌린 잡스는 이병철 삼성 회장을 만나기 전에 소니의 창업주인 모리타 아키오를 만났다.

이병철 회장과 스티브 잡스의 만남은 여러 일화를 남겼다. 잡스가 삼성 사옥으로 들어갈 때, 이 회장이 직접 나와 그를 맞이했다고 전해진다. 이제 겨우 메모리칩 제조의 초기 단계에 진입하고 있던 삼성은 잡스에게 삼성의 원대한 구상을 들려줬다. 이 회장은 잡스와의 미팅 후 그에 대해 이렇게 평가했다고 한다. “잡스는 IBM과 맞설 수 있는 인물이네”

각자의 길을 간 삼성과 애플

이젠 누구나 아는 사실이지만, 애플과 삼성의 협업은 이뤄지지 않았다. 두 ‘거인’은 각자의 길을 걸었다. 삼성은 애플의 아이폰에 대항해 갤럭시를 만들었다. 삼성은 IBM, 애플, 마이크론 등 굴지의 미국 IT 기업들을 뛰어넘고자 했고, 실제로 이뤄냈다. 2012년 삼성의 매출은 1900억달러에 달했다. 그 시절 실리콘밸리의 유망주로 꼽히던 아마존, 구글, 페이스북의 매출을 합한 것보다 약 2배를 벌었다.

올트먼이 한국을 찾은 이유도 39년 전의 상황과 비슷하다. 오픈AI는 거대언어모델(LLM)을 기반으로 한 초거대 AI 생태계를 꿈꾸고 있을 것이다. 이 같은 꿈에 온갖 종류의 AI 하드웨어가 포함돼 있음은 자명하다. ‘온디바이스(on device) AI’라고도 불리는 영역이다. 이를 실현하려면 잡스가 그랬던 것처럼 ‘칩(chip)’이 필요하다. 기억만 하는 반도체가 아니라 이번엔 기억하고 학습하고 계산하고 추론까지 할 수 있는 멀티형 반도체가 필수다.

현재 오픈AI와 올트먼은 선택의 기로에 서 있다. 챗 GPT의 두뇌를 공급하는 엔비디아에 목줄이 잡힌 채로 살아갈 것이냐, 아니면 엔비디아에 맞서 ‘제2의 애플’이 되느냐다. 그가 대만의 TSMC에 이어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를 만난 건 후자의 길을 택하겠다는 의지를 분명히 한 것이다.

초거대 AI 플랫폼 만들려는 오픈AI…커지는 삼성의 고민, "동맹이냐 각자의 길이냐"

올트먼이 앞으로 어떤 선택을 할지는 좀 더 지켜봐야 한다. 다만, 그가 TSMC를 택할 가능성은 작아 보인다. 중국과의 분쟁 가능성 등 변수가 워낙 많아서다. 그렇다면, 오픈AI와 한국 반도체 기업 간 ‘거대 동맹’이 형성될 것인가. GM이 첫 전기차를 만들 때 파트너로 LG화학의 배터리 사업부(현 LG에너지솔루션)를 택한 건 우연이 아니다. 당시 미국 정부와 자동차 업계는 일본이 전기차의 심장을 좌지우지하는 상황을 원치 않았다.

오픈AI가 주도하는 한미 반도체 동맹의 또 다른 중요한 변수는 삼성의 전략이다. 1983년의 삼성과 지금의 삼성은 완전히 다른 회사다. 삼성전자 역시 초거대 AI 플랫폼이란 전쟁에서 군소 영주로 만족하지는 않을 것이다. 단순 칩 공급 업체로 남기엔 삼성의 혁신 DNA가 이를 용납지 않을 가능성이 높다.

박동휘 기자 donghuip@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