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9년∼2046년 시대 따라 변하는 '와이프'의 의미 조명
꿋꿋하게 자리를 지킨 모든 와이프를 위해…연극 '와이프'
"봐, 이성애자들은 온 세상을 가지고 있잖아. 내 자리는 여기 이 테이블이 전부고 나는 여기를 지킬 거야."
동성애자 남성 아이바는 애인 에릭과 바에서 술을 마시던 중 영국 사회의 동성애 혐오 정서에 관해 열변을 토한다.

자신의 영역을 넓히려는 듯 테이블을 벗어나 큰 목소리로 자신의 존재감을 드러내기도 한다.

반면 성적 정체성을 공개적으로 밝히길 꺼리는 에릭은 테이블에 몸을 붙인 채 사람들의 눈치를 보기 바쁘다.

직전까지도 애인과 성적인 농담을 주고받던 에릭은 바를 전세 낸 듯 행동하는 아이바의 모습에 기를 펴지 못한다.

지난해 12월 26일 LG아트센터 서울에서 개막한 연극 '와이프'의 무대는 커플 사이에서 벌어지는 치열한 자리싸움의 현장이다.

누군가는 더 많은 공간을 차지하려 무대를 이리저리 움직이고, 다른 누군가는 자신의 자리만큼은 빼앗기지 않으려 애쓴다.

꿋꿋하게 자리를 지킨 모든 와이프를 위해…연극 '와이프'
자리싸움에 나선 커플은 아이바와 에릭뿐만이 아니다.

작품에는 1959년부터 2046년까지 네 개의 시대를 살아가는 커플들이 등장한다.

1950년대를 살아가는 여성 데이지는 가사에 전념할 것을 요구하는 남편 로버트에게 맞서 직장에서의 자리를 지키려 한다.

1988년 에릭을 휘어잡던 아이바는 중년에 접어든 2023년 카스라는 젊은 남성에게 완전히 주도권을 내준 상태다.

에릭의 딸을 만난 아이바는 예전의 자신만만한 모습은 전부 어디로 갔냐는 비아냥을 듣고도 소파에 가만히 앉아있을 뿐이다.

연극은 자리싸움에서 밀려난 이들이 '와이프'라는 이름으로 불린다는 점을 짚는다.

시대가 흐르며 와이프의 성별은 여성으로 한정되지 않는다.

가부장적인 결혼생활을 견디며 살아가는 데이지, 아이바에게 기가 꺾인 에릭, 중년이 되어 힘을 잃은 아이바도 누군가의 와이프로 살아간다.

꿋꿋하게 자리를 지킨 모든 와이프를 위해…연극 '와이프'
와이프는 얼핏 타인에게 끌려다니는 존재처럼 보이지만, 실은 타인을 위해 자신의 자리를 내어주기로 선택한 사람이다.

작품은 와이프가 자신의 희생을 존중받지 못하는 순간 언제든 관계를 끊어버릴 수 있는 무기를 지니고 있다고 말한다.

에릭이 자신을 무시하는 아이바를 향해 참았던 말을 쏟아내는 장면에서는 묵직한 힘을 느낄 수 있다.

에릭을 연기한 정환과 홍성원은 목에 핏대를 세우고 침을 튀기며 열연을 펼친다.

아이바 역의 이승주와 송재림은 에릭에게 밀리지 않는 에너지를 뿜으며 관객의 몰입을 유도한다.

노르웨이 극작가 헨리크 입센이 쓴 희곡 '인형의 집'의 줄거리를 파악하고 극을 관람하면 작품을 보다 흥미롭게 감상할 수 있다.

작품은 입센의 희곡을 차용해 시대가 변해도 관계의 핵심은 존중이라는 메시지를 전한다.

'인형의 집'은 아내 노라가 남편에게 존중받지 못한 채 살아왔다는 사실을 깨닫고 미련 없이 집을 떠나는 것으로 끝난다.

막이 바뀔 때마다 극중극으로 다양한 모습의 노라가 등장하는 것이 재미 요소다.

노라는 1950년대 드레스를 곱게 차려입은 모습에서 1980년대 스타킹을 뒤집어쓴 모습으로 등장한다.

2020년대에 접어들면 근육질의 남성 배우가 연기하는 노라를 만날 수 있다.

꿋꿋하게 자리를 지킨 모든 와이프를 위해…연극 '와이프'
영국 극작가 새뮤얼 애덤슨의 작품으로 2019년 국내 초연 당시 동아연극상 작품상을 포함해 3관왕에 올랐다.

연출은 연극 '테베랜드', '더 웨일'을 연출한 신유청이 맡았다.

배우들은 일인 다역을 소화하며 정반대의 매력을 보여준다.

조용한 성격의 에릭을 연기하던 배우는 다음 막에서 적극적인 성격의 카스로 등장해 모든 관객의 눈길을 사로잡는다.

한편 영미 문화권의 소재가 아무런 설명 없이 등장하는 순간이 많아 때로 불친절하다는 인상을 남긴다.

일례로 1930년대 진취적인 패션을 선보였던 영화배우 캐서린 헵번 등을 별다른 설명 없이 언급한다.

'와이프'는 2월 8일까지 계속된다.

꿋꿋하게 자리를 지킨 모든 와이프를 위해…연극 '와이프'
/연합뉴스